100번 검수, 5번 전문가 첨삭, 3개월 스터디의 결과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박 팀장이 또 날 긁는다.
> 서현 씨, 서현 씨 이제 입사한 지 얼마나 됐지? 이제 4년 정도 됐나?
>> 이제 만 2년 되어갑니다.
> 그래? 생각보다 얼마 안 됐네? 아직 처음 왔을 때 기억이 선명한데.
나도 선명했다. 내 첫 직장에서의 1개월이.
27살. 난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적절한 나이에 취뽀(취업뽀개기, 취업성공)하였다. 내 인생에 첫회사. 내 인생 2막을 열어줄 이 회사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찼었다. 취업을 준비할 때는 취업만 시켜주면 난 뭐든 지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아부와 같은 처세술도 전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이러한 내 환상은 정반대였고, 현실은 나도 로봇처럼 일만 하는 직장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입사 첫날, 22명의 실 선배님들에게 난 관찰의 대상이었다. 특히 실장님과 팀장님들에게 더욱더. 그날 30분 남짓 되는 시간에 내가 받은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너무 많아서 유형별로 정리해보았다.
> 거주 : 어디 살아? 누구랑? 언제부터? 고향은 어디야? 출퇴근은 얼마나 걸려?
> 가족관계: 몇 살이야? 형제관계는 어떻게 돼? 동생은 뭐해? 부모님은 일하셔? 부모님이랑 사이좋아?
> 대학교: 어느 대학교 나왔어? 졸업은 언제 했어? 졸업하고 뭐했어?
> 애정관계 : 남자 친구 있어? 솔로인 지는 얼마나 됐어? 소개팅하는 중이야?
그들은 부모님들도 모를 것들을 만난 지 30분 만에 알아버렸다.
지구인들에게 처음 발견된 화성인이 된 느낌이었다.
입사하고 한동안은 할 일도 없고, 인수인계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눈치를 보느라 힘들었다. 혹시나 실수라도 할까 봐 레이더를 사방으로 켜놓고 실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그래서 퇴근하고 집에 가면 뻗어서 자기 바빴다.
난 나름 적응을 잘하고 사람들과도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이제 나도 지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입사 3주 차 정도였다.
그날도 눈치를 보면서 박 팀장이 시킨 업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 난 엑셀 자격증이 있는데, 엑셀을 못하는 거지? 함수를 하나씩 찾아보면서 차근차근 일을 하였다.
박 팀장이 내 자리로 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건 이렇게 하면 되지~ 하면서 단축키를 타닥. 함수를 타닥. 누르면서 결괏값을 도출해냈다. 역시 연차에서 나오는 기술인 건가.
박 팀장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할 때, 박 팀장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 서현 씨가 입사할 때 자소서에 뭐라고 썼더라~ 어린 시절에 사고가 있어서 그걸로 힘들었다고 했지~ 아 서현 씨 자소서가 여기 어디 있는데~ 여깄다~ "교환학생 시절 제가 다니는 학교는 인종차별이 심했고~~~~"
미쳤다. 내 자소서를 보고 읽고 있었다. 왜 내 자소서가 그의 손에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건 원래 인사팀에서 관리하지 않나? 개인정보보호에 자소서는 들어가지 않는 건가? 거기 내 인적사항이 다 들어가 있는데?
이 팀장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 서현 씨, 대단하다~ 자격증 되게 많네~ 다음에 중국어 할 일 있을 때 서현 씨 시키면 되겠다.
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실 사람들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기분이 거지 같았지만, 입사 3주 차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눈웃음 짓는 것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시작이라는 것을. 그 이후로도 박 팀장은 나한테 일을 시키거나 내가 실수를 할 때마다 내 자소서를 사무실에서 일어나서 읽었고, 이제는 외워서 안 보고도 말할 경지에 올랐다. 그때마다 아무도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고, 나도 그냥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소서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였다. 하나의 자소서를 완성하기 위해 며칠 밤도 새우면서 토씨 하나까지 나의 정성과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무 보잘것없는 나를 회사원으로 만들어준 기적의 노력을 보여주는 결과물이었다. 이런 자소서에 난 당당하였지만, 회사 동료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진짜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한 번 더 내 자소서에 관해 언급하면 진짜 정색하고 그만하라고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일주일이나 지났을 까, 아침부터 박 팀장이 내 자소서를 또 정독하면서 일어나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서현 씨~ 서현 씨 여기 오타 있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오타가 있는데 합격했단 말이야?
치욕스러웠다. 감히 인사담당자도 아닌 사람이 내 소중한 것을 건드리다니.
> 박 팀장님.. 혹시 제 자소서 제가 좀 가져갈 수 있을까요?
>> 왜? 서현 씨 자랑스럽지 않나?
> 아. 그냥 좀 다른 분들이 내용을 아시는 게 좀 그래서요..
>> 그래, 그럼.
내가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그걸 가뿐히 무시하며 찢어버렸다.
> 어차피 버릴 거 아니야?
>> 아. 네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해! 찢어도 내가 찢어 버리지!
난 어쩔 수 없는 신입사원이었다. 사람들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소심해졌다.
다음에는 꼭 인사팀으로 발령 났으면 좋겠다.
박 팀장 자소서 이마에 붙이고 다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