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부서는 단시간 근로자를 받았다. 단순 문서작업과 같은 일들이 그들의 업무였다. 단시간 근로자 3명 모두 막 대학을 졸업한 분들이었고, 상대적으로 나이 차이가 적게 나는 나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문서철 작업, 부서 경비 작업 등 업무 중 일부분을 단시간 근로자분들께 부탁을 해왔기 때문에 더 친밀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서현 씨"라고 부르기 어색해하면서, 따로 있을 때는 "언니", "누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사회초년생인 내가 나보다 더 초년생인 그들을 보면서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었다.
이번 주 금요일이 단시간 근로자들의 마지막 근무 날이다. 유난히 날 잘 따랐던 친구들이라 아쉬움이 컸다. 실장님도 아쉬우신 건지 아님 나름의 생색을 내고 싶으신 건지 금요일에 간단하게 피자, 치킨이라도 시켜먹자고 하였다. 마지막 날인데 더 좋은 거 대접 좀 해주지 싶다가, 그래 뭐라도 챙겨주는 게 어디인가 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그들이 좋아하시는 브랜드로 시켜드려야겠다 다짐했다.
목요일 아침, 오늘 개인적으로 단시간분들에게 연락을 해서 점심을 먹자고 하였다. 그래도 친하게 지냈고, 그동안 코로나 핑계로 제대로 맛있는 것도 사주지 못한 것 같아서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마지막이라고 하니 뭐라도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4인까지 외부 점심식사가 가능하였고, 우리는 점심에 이탈리안 가게에 가기로 하였다. 오전부터 점심시간만 기다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실장님이 찾으셨다.
> 서현 씨. 서현 씨가 그 단시간들이랑 친하게 지냈었지?
>> 아~ 다들 친하긴 한데, 제가 나이가 가장 비슷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 그렇지~? 그럼 오늘 점심에 서현 씨가 단시간들 데리고 나가서 나가서 맛있는 거 먹어. 그 길 건너 소고기 집 알지? 향죽인가? 거기 가. 부서카드로 결제하고.
>> 아 넵 알겠습니다.
뭐지? 웬일인가 싶었다. 회사 돈으로라도 실장 체면 챙기고 싶은 건가. 그래도 좋았다. 우리끼리 넷이서 무려 한우라니. 내 월급으로는 한우는 감히 상상도 못 했는데. 신이 났다. 단시간분들께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바로 이과장한테 갔다.
이과장 : 84년생, 남, 기혼, 유치원생 딸 하나, 백실장이랑 친함.
이과장은 부서 내 카드와 회계처리를 담당하고 나는 주로 그의 명령 혹은 부탁에 따라 부서 내 간식이나 물품들을 구매하곤 한다.
> 과장님~ 실장님이 단시간 근로자분들 마지막이라고 향죽가라고 하셨는데, 회의비 처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 아 실장님이 부서 돈으로 먹으라고 하셨어? 서현 씨도? 서현 씨는 왜 먹어?
> 제가 친하게 지냈다고 같이 먹으라고 하시더라고요.
>> 그래..? 암튼 알겠어.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몇 시에 나가려고?
> 12시쯤이요
>> 그래 좀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뭘 생각한다는 건 지 알 수가 없었다. "부서카드"라는 명백한 정답이 있는데 생각이 왜 필요한 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부서 돈 사용방법이 있는 걸까. 암튼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기다려보기로 했다.
10분 남짓 지났을 까. 이과장이 날 자리로 불렀다.
> 서현 씨. 생각해보니까 우리 단시간들 맨날 밥도 제대로 안 챙겨 줬는데, 월성댁 가서 밥이라도 챙겨줘.
>> 네? 월성댁이요?
> 응 그래~ 단시간들 국밥 한 그릇 먹이고 보내야지~
>> 아.. 월성댁 가라고요? 그래도 실장님이 고기 먹으라고 하셔서, 고기 먹는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
> 아 벌써 말했어? 그럼 기다려봐 내가 실장님이랑 얘기해볼게.
당황스러웠다. 한우에서 갑자기 만 원짜리 순대국밥이라니. 평소에는 순대국밥에 환장하는데 오늘은 한우를 기대해서 그런지 실망감이 커졌다. 그리고 실장님이 먹으라고 했는데 왜 이과장이 중간에서 커트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서카드 예산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백실장이랑 이과장은 둘이서 출장을 핑계 삼아서 매일 향죽이나 현서정육에 가서 20~30만 원씩 먹고 왔다. 그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들이 먹어야 하는 데 우리가 가서 먹어서 얄미운 건가.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옵션이 점점 더 나빠질 것만 같아서 점점 화가 났다. 실장님이 먹으라고 했는데 왜 중간에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만약 부서 예산이 한정적이어서 그렇다면 사실대로 우리 부서 예산이 많이 부족해서 국밥 먹어도 되겠냐고, 실장님이 예산 상황을 모르시고 말하신 것 같다고 이해해달라고 했으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데 왜 우리를 위해주는 척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일까. 한숨만 났다. 이제 40분 후면 밥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전혀 신나지 않았다. 그냥 내 돈 주고 이탈리안 먹고 싶었다.
15분쯤 지났을까. 이과장이 또 자리로 불렀다.
> 서현 씨. 내가 실장님이랑 얘기해봤는데, 그럼 그 정육식당 갈래? 밥은 챙겨줘야지~ 고기도 먹고
>> 아 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가 싫었다.
>> 카드 주시면 회의비 기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시간분들께 카톡을 했다.
> 아 진짜 미안한데, 그냥 우리 이탈리안 갈까요? 아 제가 살게요~ 정육식당 가라고 하는데 거기 아저씨들도 많고 점심에 고기도 많이 없어서 그냥 백반집이랑 똑같거든요.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사실 정육식당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이과장 말 듣기 싫어서 내돈내산 하기로 다짐했다. 12시 5분 전.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이과장이 또 나를 불렀다.
> 서현 씨. 근데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정육식당보다 애들 뜨뜻한 국밥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냥 월성댁 가서, 음~, 그래 4명이지? 순대국밥 4개랑 모둠 순대도 추가해서 먹으면 되겠다. 그럼 딱이네~ 아니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단시간들 몇 달 있지도 않았는데, 부담스러울 거야. 서현 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결국 돈이 아까운 것 같았다. 회의비 잔뜩 남아있는 것 같은데.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자기가 써야 하는 돈을 단시간이 쓸까 봐 아까워서 저러는 거였다. 소름이 끼쳤다. 가증스러웠다.
결국 난 내돈내산을 하였다. 더럽고 치사하다는 말을 단편적으로 보여줬다. 진짜 퉤 퉤 퉤!
이과장은 점심을 먹고 온 우리에게
> 어때? 월성댁 맛있지~? 거기가 국밥이 아주 맛있어 ~ 더울 땐 이열치열이지 너네는 좋은 곳 다닌 줄 알아~ 이렇게 뭐 사주고 그런 곳 없다~ 고생했어~~
미쳤다. 창피했다. 내가 이런 조직에 속해있다는 게 끔찍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백실장이랑 이과장이 점심쯤에 출장을 갔다가 1시간 거리에 있는 대게나라에서 점심을 먹고 왔다. 심지어 공용차를 타고 갔다가 소주를 마시는 바람에 대리운전을 불러서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