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냥 내돈내산 할게요.
누가 사달라고 했냐고, 제 돈 주고 사 먹을 테니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올해 우리 부서는 단시간 근로자를 받았다. 단순 문서작업과 같은 일들이 그들의 업무였다. 단시간 근로자 3명 모두 막 대학을 졸업한 분들이었고, 상대적으로 나이 차이가 적게 나는 나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문서철 작업, 부서 경비 작업 등 업무 중 일부분을 단시간 근로자분들께 부탁을 해왔기 때문에 더 친밀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서현 씨"라고 부르기 어색해하면서, 따로 있을 때는 "언니", "누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사회초년생인 내가 나보다 더 초년생인 그들을 보면서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었다.
이번 주 금요일이 단시간 근로자들의 마지막 근무 날이다. 유난히 날 잘 따랐던 친구들이라 아쉬움이 컸다. 실장님도 아쉬우신 건지 아님 나름의 생색을 내고 싶으신 건지 금요일에 간단하게 피자, 치킨이라도 시켜먹자고 하였다. 마지막 날인데 더 좋은 거 대접 좀 해주지 싶다가, 그래 뭐라도 챙겨주는 게 어디인가 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그들이 좋아하시는 브랜드로 시켜드려야겠다 다짐했다.
목요일 아침, 오늘 개인적으로 단시간분들에게 연락을 해서 점심을 먹자고 하였다. 그래도 친하게 지냈고, 그동안 코로나 핑계로 제대로 맛있는 것도 사주지 못한 것 같아서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마지막이라고 하니 뭐라도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4인까지 외부 점심식사가 가능하였고, 우리는 점심에 이탈리안 가게에 가기로 하였다. 오전부터 점심시간만 기다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실장님이 찾으셨다.
> 서현 씨. 서현 씨가 그 단시간들이랑 친하게 지냈었지?
>> 아~ 다들 친하긴 한데, 제가 나이가 가장 비슷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 그렇지~? 그럼 오늘 점심에 서현 씨가 단시간들 데리고 나가서 나가서 맛있는 거 먹어. 그 길 건너 소고기 집 알지? 향죽인가? 거기 가. 부서카드로 결제하고.
>> 아 넵 알겠습니다.
뭐지? 웬일인가 싶었다. 회사 돈으로라도 실장 체면 챙기고 싶은 건가. 그래도 좋았다. 우리끼리 넷이서 무려 한우라니. 내 월급으로는 한우는 감히 상상도 못 했는데. 신이 났다. 단시간분들께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바로 이과장한테 갔다.
이과장 : 84년생, 남, 기혼, 유치원생 딸 하나, 백실장이랑 친함.
이과장은 부서 내 카드와 회계처리를 담당하고 나는 주로 그의 명령 혹은 부탁에 따라 부서 내 간식이나 물품들을 구매하곤 한다.
> 과장님~ 실장님이 단시간 근로자분들 마지막이라고 향죽가라고 하셨는데, 회의비 처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 아 실장님이 부서 돈으로 먹으라고 하셨어? 서현 씨도? 서현 씨는 왜 먹어?
> 제가 친하게 지냈다고 같이 먹으라고 하시더라고요.
>> 그래..? 암튼 알겠어.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몇 시에 나가려고?
> 12시쯤이요
>> 그래 좀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뭘 생각한다는 건 지 알 수가 없었다. "부서카드"라는 명백한 정답이 있는데 생각이 왜 필요한 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부서 돈 사용방법이 있는 걸까. 암튼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기다려보기로 했다.
10분 남짓 지났을 까. 이과장이 날 자리로 불렀다.
> 서현 씨. 생각해보니까 우리 단시간들 맨날 밥도 제대로 안 챙겨 줬는데, 월성댁 가서 밥이라도 챙겨줘.
>> 네? 월성댁이요?
> 응 그래~ 단시간들 국밥 한 그릇 먹이고 보내야지~
>> 아.. 월성댁 가라고요? 그래도 실장님이 고기 먹으라고 하셔서, 고기 먹는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
> 아 벌써 말했어? 그럼 기다려봐 내가 실장님이랑 얘기해볼게.
당황스러웠다. 한우에서 갑자기 만 원짜리 순대국밥이라니. 평소에는 순대국밥에 환장하는데 오늘은 한우를 기대해서 그런지 실망감이 커졌다. 그리고 실장님이 먹으라고 했는데 왜 이과장이 중간에서 커트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서카드 예산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백실장이랑 이과장은 둘이서 출장을 핑계 삼아서 매일 향죽이나 현서정육에 가서 20~30만 원씩 먹고 왔다. 그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들이 먹어야 하는 데 우리가 가서 먹어서 얄미운 건가.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옵션이 점점 더 나빠질 것만 같아서 점점 화가 났다. 실장님이 먹으라고 했는데 왜 중간에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만약 부서 예산이 한정적이어서 그렇다면 사실대로 우리 부서 예산이 많이 부족해서 국밥 먹어도 되겠냐고, 실장님이 예산 상황을 모르시고 말하신 것 같다고 이해해달라고 했으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데 왜 우리를 위해주는 척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일까. 한숨만 났다. 이제 40분 후면 밥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전혀 신나지 않았다. 그냥 내 돈 주고 이탈리안 먹고 싶었다.
15분쯤 지났을까. 이과장이 또 자리로 불렀다.
> 서현 씨. 내가 실장님이랑 얘기해봤는데, 그럼 그 정육식당 갈래? 밥은 챙겨줘야지~ 고기도 먹고
>> 아 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가 싫었다.
>> 카드 주시면 회의비 기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시간분들께 카톡을 했다.
> 아 진짜 미안한데, 그냥 우리 이탈리안 갈까요? 아 제가 살게요~ 정육식당 가라고 하는데 거기 아저씨들도 많고 점심에 고기도 많이 없어서 그냥 백반집이랑 똑같거든요.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사실 정육식당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이과장 말 듣기 싫어서 내돈내산 하기로 다짐했다. 12시 5분 전.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이과장이 또 나를 불렀다.
> 서현 씨. 근데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정육식당보다 애들 뜨뜻한 국밥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냥 월성댁 가서, 음~, 그래 4명이지? 순대국밥 4개랑 모둠 순대도 추가해서 먹으면 되겠다. 그럼 딱이네~ 아니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단시간들 몇 달 있지도 않았는데, 부담스러울 거야. 서현 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결국 돈이 아까운 것 같았다. 회의비 잔뜩 남아있는 것 같은데.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자기가 써야 하는 돈을 단시간이 쓸까 봐 아까워서 저러는 거였다. 소름이 끼쳤다. 가증스러웠다.
결국 난 내돈내산을 하였다. 더럽고 치사하다는 말을 단편적으로 보여줬다. 진짜 퉤 퉤 퉤!
이과장은 점심을 먹고 온 우리에게
> 어때? 월성댁 맛있지~? 거기가 국밥이 아주 맛있어 ~ 더울 땐 이열치열이지 너네는 좋은 곳 다닌 줄 알아~ 이렇게 뭐 사주고 그런 곳 없다~ 고생했어~~
미쳤다. 창피했다. 내가 이런 조직에 속해있다는 게 끔찍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백실장이랑 이과장이 점심쯤에 출장을 갔다가 1시간 거리에 있는 대게나라에서 점심을 먹고 왔다. 심지어 공용차를 타고 갔다가 소주를 마시는 바람에 대리운전을 불러서 왔다고 한다.
이과장이 불평불만없이 회의비 처리를 했다.
회사돈과장산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냐?
부자가 되고 싶다. 그냥 더럽고 치사해서 다 내 돈으로 해결하고 싶다.
그 이후로도 그 두 콤보는 한 달에 두 번씩 점심 출장을 갔다.
부서카드를 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