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와 대화를 해도, 마음이 오간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화 주제는 주로 자기 얘기였고, 다른 사람이 그 얘기를 듣고 어떤 생각인지는 관심 없어 보였다.
누가 피곤하다고 하면 “어제 안 자고 뭐했어.”
누가 서운하다고 하면 “그게 왜 서운해?”
누가 썸 탄다며 설레는 이야기를 꺼내도, “그래서 지금 사귀는 거야, 아닌 거야?” 같은 말을 던지는 그런 친구였다. 감정을 주고받는 대화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랄까.
싹수가 없다기보단, 감정이라는 게 왜 필요한지를 잘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쟤는 연애는 진짜 못 하겠다”는 말을 웃으며 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오랜만에 친구들끼리 시내에서 만나기로 했고, 다들 깔끔하게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그 친구만 평소처럼 김치국물이 지워지다만 후줄근한 티셔츠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나왔다. 신경 쓴 흔적이라곤 없었고, 그 무심함이 오히려 당당했다. 누가 웃으며 말했다.
“야, 우리 다 맞춰 입고 왔는데 너 혼자 주말 마트 나온 사람 같아.”
다른 친구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너만 드레스코드 안 맞췄잖아.”
걔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남자들끼리 밥 먹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
근처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우리 중 한 명이 메뉴판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기 감바스 맛있대! 이거 시켜보자.”
그 순간, 걔가 툭 뱉었다.
“감바스? 기름만 많고 먹을 것도 없잖아.”
그 말에 메뉴 고른 친구가 순간 정색했다.
“야, 내가 먹고 싶어서 말한건데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있어?”
그제야 걔가 머쓱하게 웃으며,
“아, 그냥… 메뉴 자체가 별로라서. 그런 뜻은 아니었어.”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어색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생각했다.
‘아, 이 친구는 자기 감정엔 솔직한데, 남의 감정엔 서툰 사람이구나.’
무심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웃자고 던진 말이 어떻게 분위기를 가라앉히는지도.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 곁에 머무는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쟤는 연애 못 하겠다”는 말엔, 웃음보다는 약간의 안쓰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런 애가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 들었을 땐 솔직히 실감이 안 났다.
“걔가? 누굴 만나? 진짜로 연애를 해?”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누가 그 애를 만나나 싶었다. 그 무심함과 자기중심적인 말투를. 그래서 더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길래 저 사람과 연애를 하지?’
직접 만나본 그분은 놀랍게도, 친구의 그 무심한 말투와 털털한 태도,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좋다고 했다. 솔직해서 오히려 편하다고. 이해는 잘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래 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 특유의 무심함은, 누군가를 서운하게 하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러다 말겠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바뀐 건 여자친구분이 아니라, 친구 쪽이었다.
한 번은 셋이서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나, 그 친구,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 그의 여자친구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자리였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말투나 표정에서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사람을 판단하려는 기색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말을 더듬어도, 어설픈 농담을 해도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저 ‘함께 있는 것’ 자체에 집중할 줄 아는 것. 그건 애써 만든 태도가 아니라, 오랜 시간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여유 같았다. 그 친구가 달라질 수 있었던 건, 그 사람 앞에서 처음으로 ‘지금 모습 그대로도 괜찮다’는 안정감을 느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안에 원래 있었지만 오랫동안 꺼내지 못했던 면들이 누군가의 믿음 앞에서 조심스레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그 친구가 조금씩 달라졌다는 걸 느낀 건, 여자친구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말을 툭툭 던지던 사람이 어떤 말을 써야할지 고르기 시작했고 상대의 표정을 먼저 살피는 일이 잦아졌다. 시덥잖은 수다에도 가끔은 마음을 담는 듯했고, 누군가의 취향 같은 걸 어설프게라도 기억하려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전엔 남 얘기에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애가, 이젠 말끝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저 자기중심적이던 시선이, 서서히 누군가를 향하기 시작한 것. 사람은 말로 바뀌지 않는다. 의지로도, 충고로도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 앞에서는 처음 꺼내보는 마음을 내어보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게 누군가를 통해,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정한 나를 꺼내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친구는 누가 바꾼 게 아니었다.
단지, 그 사람 앞에서야 비로소 진짜 자신의 모습을 꺼내 보일 수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