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돌과의 만남

물감과 돌

by 도겸

"학장 때문에 들었어."


? 내가 잘못 들었나? 나 때문에 미술 비평을 들었다고? 앞뒤가 안 맞는데?

그녀가 날 뭘 안다고? 날 따라서 수업을 신청했다고? 이게 뭔 소리야?

횡성 한우 미국 가는 비행기 타는 소리야?


"어?? 나 때문에???"

"응. 처음에 학장 보고 되게 멋있는 사람 같았어. 아니 뭐. 연예인처럼 멋지다는 게 아니라. 나랑 동갑인데 내가 다니고 싶었던 미술대학의 학생 회장이잖아. 학장 처음 봤을 때 되게 신기했어. 와..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학장이랑 친해지고 싶었어. 처음에 합격 소식 들었을 때 걱정 정말 많이 했거든. 같은 학번 애들보다 5살이나 많은데... 같이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정말 많았어. 학장 보고서 조금 마음이 놓였어. 나랑 동갑이 있다는 게 참 위안이 됐다랄까? 그러다가 우연히 과 사무실에서 학장이 조교 쌤한테 미술비평 수업 물어보는 거 봤어. 그게 뭐지? 궁금해서 효선 선배한테 물어봤어. 아무나 들을 수 있는 수업 이라길래 그냥 무작정 신청했어. 학장이랑 같은 수업 한번 들어 보고 싶어서.."


맞다. 조교 쌤에게 이 임재순이 그 임재순 맞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맙소사.. 세상은 정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가 중력이다. 확실하다. 갈릴레오가 틀렸다. 뉴턴이 틀렸다.

나는 무슨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오늘 과제받았을 때 엄청 고민했어. 어떻게 해야 하지? 괜히 했나? 1학년이 안 하는 이유가 있구나... 그래서 보라 선배한테 물어봤어.. 보라 선배는 벌써 계획 다 세워져 있어서 도와줄 수가 없다 하더라고... 진짜 창피하더라.. 그런데 보라 선배가 뭐라 했는지 알아?? '학장한테 물어봐요 언니. 학장 그런 거 잘해요. 그리고 학장 주말엔 아무것도 안 해요 ㅋ' 그래서 학장한테 연락한 거야."


이거 칭찬이야 욕이야? 주말에 내가 그렇게 한가 해 보였나?? 머리가 아니, 마음이 복잡했다.

이거 그린 라이트야?? 아닌 거 같은데? 그냥 단지 도움이 필요해서 요청한 거 같은데? 나밖에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도와줄 사람이 나 밖에 없다고? 그럼 그게 운명 아니야? 아닌가?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지하철 바닥만 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그녀가 깨트린다.


"그래서 오늘 고마 웠다고"

"어.. 아니 뭐.. 나도 해야 하는 과제인데 뭘.."

"그럼 나 먼저 내릴 게 학장."

"어. 잘 가.. 요.."


친척 동생과 조금 멀리 산다고 했다. 아직 두 정거장 남았다. 학교 까지는.

남은 두 정거장 동안 정리가 필요했다.

그녀는 나를 처음 봤을 때 멋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반한 것은 아니다.

나랑 친해지고 싶어 미술 비평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동갑이라는 이유 때문에 친해지고 싶은 것뿐이다.

과제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 말고는 없다.

결과 도출만 보더라도 긍정적 시그널은 없다. 안심과 아쉬움이 한꺼번에 큰, 아주 엄청나게 큰 파도로 넘어온다.


내일은 엄마 집에 가서 리포트나 써야겠다.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을 지나고 있다. 그녀는 연락이 없다.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리포트는 잘 썼나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빨간 자판기 커피를 뽑아 학생회 사무실에 들어간다.

띠리리리~~ 전화가 온다. 옆 체육과 학장이다.

"어 왜"

"야 미장(미술학회장). 내일 축구 땜빵 나와라. 한명 펑크 났다."

"몇 시?"

"너 몇 시에 끝나?"

"내 맘."

"역시 미장 존나 멋있어 ㅋㅋ 5시"

"콜"


난 축구를 좋아한다. 같이 할 학우가 없어 못한다. 다행히 체장(체육학회장)이랑 친하다. 근데 형이다. 체장 형은 친형처럼 날 대해 준다. 처음 만나 건 나 신입생 때다. 예체능 과끼리 돌아가며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형을 처음 봤다.

"심심하면 축구하러 와. 말이 체대지 축구 못하는 체대생도 많아."

"에이. 체대생인데 잘하겠죠. 저희보다는."

"야. 너 그림 잘 그려?"

"아!!"

그 이후로 형이랑 난 친해졌다.


보라가 문을 열고 들어 온다.

"오~~~~ 학짱~~~~~ 짱~~~~~~"

?? 뭐야.

"뭐야. 왜. 뭐."

"상아 언니랑 데이트했다며! 아힝~~"


큰일이다. 어떻게 알았지? 아니. 데이트 아닌데?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데?? 이거 아닌데??


"아 뭔 데이트야. 과제하러 간 건데. 네가 얘기해 줬다며"

"아니 난 뭐 학장이 시간 될 거다 말만 해 준 거지, 같이 뭐. 이렇게. 뭐. 같이. 어? 뭐. 술도 한잔 하고. 뭐. 어?? 이히히히히"

어떻게 알았지? 잠깐. 그때 주전자에 누가 있었나??

"오빠, 그 수업 듣는 사람이 우리 셋이야?? 그 과제하러 종로 가는 사람이 우리 셋이야?? 애들이 봤데. 걱정 마. 오해 안 해요. ㅋ오빠 우리 과 민원 봉사자인 거 애들 다~~ 알아요."


아! 생각 못했다. 다른 아이들도 그곳을 갈 거라는 것은. 정말 생각 못했다. 미술비평 수업을 누가 듣더라... 조사 좀 해봐야겠다. 우리를(우리... 낮 간지럽다.) 본 놈들이 누구인지 추려 봐야겠다.


"아 오빠 내일 임원 회의 할 거예요?"

아! 맞다. 깜빡했다.


"아니, 수요일에 하자."

"어? 왜? 혹시 축구? 누구랑? 체장 오빠랑?"

"아 몰라"


보라는 체장 형을 좋아한다. 그런데 체장 형은 보라한테 관심이 없다.

"나도 가도 돼?? 아, 어차피 내일 회의 안 한다며. 그럼 나도 할 일 없어져 오빠."

"니 맘대로 해. 언젠 물어보고 왔냐?"


머리를 식혀야 한다. 내가 아니면 아닌 거다. 난 그녀와 데이트를 한 것이 아니라 과제하러 간 거다.

그래, 보라의 말대로 우리 과 학생의 민원 처리해 주러 동행한 거다. 내 합리화 멋지다.


띠리리리~ 이번엔 누구지? 조교선생님이다.

"예. 선생님"

"학장아~. 학과장님 호출~"

"예."

학과장 교수님이 나를 부르는 이유는 뻔하다. 엠티 준비. 다행히 보라랑 효선이랑 임원들이 너무 잘 준비해 주고 있다. 최고의 엠티를 만들 것이다.


똑똑똑

"어 들어와."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 야 학장아. 신입 중에 차상아 있지."

어? 그녀를 왜 교수님이 물으시지? 이건 내가 준비한 시나리오가 아닌데??"

"아 네. 있습니다."

"그 친구 나이가 많더구먼."

"저랑 동갑입니다."

"아, 많은 건 아니구나. 허허. 그 친구 좀 잘 보살펴 줘. 혼자 나이 많아서 방황할지도 몰라. 괜히 자퇴하거나 그러지 않게. 잘 챙겨줘. 동갑이면 친구처럼 지내도 좋잖아."

자퇴생이 많으면 학교 본부에 좋지 않은 소리가 들어간다는 조교 선생님이 언젠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네 교수님. 파트장한테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어 그래. 뭐 학장 너 잘하잖아. 엠티는 잘 준비하고 있지? 너무 멀리 가지 마."

"네 알겠습니다."

세상이 날 중심에 두고 도는데 차상아라는 위성이 그 주변을 도는 느낌이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녀의 이름이 내 주변을 맴돈다. 어지럽다.




화요일. 체장 형 만나러 운동장으로 간다. 군대 있을 때부터 신어 왔던 파란색 나이키 축구화만 덜렁덜렁 들고.

"와썹! 베이비"

"와썹 브라더"

우리의 인사다. 5:5 풋살이지만 생각보다 힘들다. 전반전이 끝나고 형과 나는 헉헉 거리며 물을 마시러 나갔다. 저기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보라다.

"형. 보라. 손 한번 흔들어 줘. 손만 흔들지 말고, 얼굴 보고."

"어. 어? 옆에 여자는 누구야? 같이 흔드는데? 누구야?"


그녀다.


왼손에 들고 있는 물통이 멈췄다. 그녀가 여기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다. 아니. 나를 보고 손을 흔드는 것 같다. 그녀가 여기 왜 있는 거지? 정말 내 위성인 거야? 내 달이야??

후반전을 나도 모르게 오버 플레이를 한다. 발목에 무리가 갈 정도로. 왜 오버하지? 한시간의 짧은 경기는 끝났다.


"야 베이비. 저 여자 누구야. 너네 과야? 이쁜데?? 누구야?"

그녀가 보라와 나란히 앉아 무언가 종알거리고 있다.


"어. 우리 과 신입. 보라랑 친해."

"졸라 이쁜데?"

"어. 알아."

체장 형이 웃는다. 아씨 걸렸다.


"언제 같이 밥이나 먹자."

"응. 부라더 혼자.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런 사이를 만들고 만나자는 거지. 병쉰아."

그럴싸하다. 그러면 안 된다. 나는 그녀의 민원 봉사자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편의점에서 형이랑 축구팀들이랑 삼각 김밥에 맥주 한 캔으로 저녁을 때운다. 형은 먹을 거 하나는 잘 사준다. 부자다.

"집에 가냐? 술 마실래?"

"아니. 미안. 나 작업하러 가야 돼"

"아 미대생 존나 불쌍해... 맨날 작업.."

"지는... 매일 새벽 운동 모임.."

"ㅋㅋㅋ 병쉰.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샤워는 학교 가서 하면 된다. 옷은 작업복으로 어차피 갈아입는다. 축구화를 들고 터벅터벅 미술대학으로 올라간다. 샤워를 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석조장으로 나간다. 조명을 켜고 내 공구들을 챙긴다.

나는 이 시간을 굉장히 좋아한다. 조용하다. 내 공구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나 혼자다.학과장님의 파워로 밤에도 조각과는 야외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위험한 석조장의 관리를 나에게 맡기셨다. 모든 작업장 열쇠는 나에게 있다. 위이~~~~~잉!!!!!!! 그라인더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돌아간다. 엄청나게 시끄러우므로 내 귀에는 항상 이어폰이 끼워져 있다. 그러나 어차피 내 이어폰에 나오는 음악은 판테라의 I'M BROKEN이라서 그라인더 굉음 소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뒤가 싸~~ 한 느낌이 든다. 조각과는 항상 시끄러운 곳에 있기 때문에 들리지 않아도 무언가를 감으로 느끼는 초능력이 있다.

차례대로, 순서 대로 그라인더 전원을 끄고 멈출 때까지 기다린 다음 날이 위로 향하도록 내려놓고, 전원 플러그를 뺀 다음 뒤를 돌아본다. 조각과에게 이 순서는 굉장히 중요하다. 잘 못하다가는 나 또는 다른 사람이 크게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다.

그녀가 쪼그리고 앉아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날 보고 있다. 한 마리 강아지 같다. 말티즈 강아지.


"어? 여기 왜 있어요?"

"궁금해서 와 봤어요"

"뭐가요?"

"조각과 요."


왜 부끄럽지?


"와.. 이게 돌조각이구나.. 이게... 학장은 재밌다는 거죠?"


그녀가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며 이야기한다.

"신기하다~"


그녀가 바닥에 굴러 다니는 돌 한조각을 들어 올린다.

두 번째 다음이 온 것 같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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