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돌
조교 쌤. 원희. 보라. 그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임이다. DNA도 저렇게 모이면 돌연변이가 될 것이 뻔하다.
조교 쌤이 나를 찾았는데 안보였고, 그때 마침 원희가 지나갔으며, 같이 밥이나 먹기로 한 그때 마침 보라가 지나갔으며, 할 일 없던 보라가 합류가 되었고, 그때 마침 그녀가 지나가길래 합류할 의사를 물어보니 흔쾌히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대학생끼리의 역사는 하교 때 만들어진다는 선배의 말이 생각이 난다.
우리 다섯의 이야기는 학교 이야기뿐이다. 그림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우리가 그렇게 열정적인 미술, 예술 학도들은 아닌 듯싶다. 원희와 그녀를 제외한 우리 셋은 학교 살림을 해야 하기에 정책 이야기만 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술이 제법 들어간다. 낮에 도파민이 너무 과하게 터졌었나 보다. 무엇 보다도 그녀가 내 앞에 앉아 있다. 동그랗게 앉아야 하는 이곳 껍데기 집 테이블이 너무 감사하다.
띠리리리~ 조교 쌤 전화기가 울린다.
"아. 네. 교수님. 아. 학교 앞에서 애들이랑 밥 먹고 있습니다. 아. 아니요 많이 안 먹었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교수님이 찾으시나 보다.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우리 교수님은 학생들에게는 참 정말 좋은 교수님이신데 조교 샘을 너무 힘들게 하신다. 그나마 다행은 그 일들을 조교샘은 즐기고 감사해한다.
"야.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더 먹을 거면 늬들이 사 먹어."
"네. 들어가세요."
원희와 나는 신입생 시절부터 함께 해 왔다. 신기하게 군대 신병 훈련소도 같은 곳에서 같이 훈련을 받았다. 보라는 복학생이었던 작년부터 친했다. 성격이 참 좋은 후배다. 우리 셋 사이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왜 내가 미안한지 모르겠다.
"야. 가자. 피곤해. 잘래" 원희가 피곤한가 보다. 난 좋은데..
"그래요. 아우 내일 아침에 영어 수업 가야 돼" 보라도.. 아. 도움 안 되는 새끼들...
껍데기 집을 나와 보라와 원희는 오른쪽으로 간다.
"언니는 어디로 가야 해요?"
"저는 이쪽이요"
나와 같은 방향이다. 이제는 신의 장난 같지도 않다. 운명이라 생각이 든다. 이건 운명이다.
"그럼 가라."
"가요. 오빠~"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가 먼저 말을 건다.
"전화하려 했는데, 여기 오느라 못했어요. 근데 왔네요? ㅎ 전화 안 해도 되겠다."
안 기다렸다는 모습을 살짝 풍겨야 한다.
"아, 그러네요. 그런데 왜 전화하려 했어요?"
"그냥.. 문자로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럼 학장. 언제 종로 갈 거예요?"
"저는 토요일에 가려고요."
실은 일요일에 가려 했다. 엄마가 반찬 가져가라 했는데, 토요일에는 집에 늦게 올 거라고 일요일에 오라고 했었다. 그런데 토요일에 갈 거라고 한 이유는 하루라도 빨리 그녀와 함께 종로를 가고 싶었다. 도박이었다. 그녀가 자기는 토요일 안 된다 하면 큰일이다.
"아 다행이다. 저도 토요일 좋은데. 그럼 토요일 괜찮죠?"
후후후. 이건 운명이다. 지금까지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만화도 이렇게 그리면 욕먹을 것이다.
"그래요. 그럼 토요일 아침에 학교에서 만나요. 그런데 집이 어디예요?. 집 근처에서 만날까요?"
아뿔싸!!! 말이 좀 이상하다. 집을 왜 물어봐!!
"저 동생이랑 사는 데는 좀 멀어요. ㅎ 학교로 올게요."
어딘지 궁금했지만, 물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요. 아침에 문자 할게요." 내 자취방 앞에 도착했다.
"저는 여기 살아요. 조심히 가세요."
"아. 예. 안녕히 가세요. 계세요? 가세요?"
ㅎㅎㅎ 둘이 실 없이 웃는다.
너무 행복한 하루였다.
토요일 아침. 잠을 잘 못 잤다. 내일 비 온다더니 하늘이 꾸리꾸리 회색이다. 화강석 같다. 젠장.
어제부터 고민을 했다. 옷을 뭘 입지? 오랜만에 꾸며? 아 그럼 너무 티 나나? 그래. 언제나 그렇듯 미니멀리즘.
베이색 면바지와 하늘색 반팔 폴로티, 검은색 나이키 운동화를 골랐다. 그리고 가방에는 볼펜과 A4용지를 챙겼다. 투명 파일도 하나 챙겼다. 전시 브로셔를 챙겨햐 하기 때문이다. 옳지! 두 개를 챙겨야겠다. 그녀는 안 가지고 올 것이 뻔하다.
집을 나와 그녀에게 문자를 했다.
-저는 지금 학교로 갑니다. 15분 정도 걸려요.-
띠링
-네 저도 거의 다 왔어요-
학교 정문에 도착하니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가까이 가 인사를 한다
"안녕.."
"네.^^ 어??"
"? 왜요?"
왜 그녀가 놀랬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1초 걸렸다. 그녀는 핑크색 폴로티에 베이지색 면바지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이 상황은 운명이 맞으며,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날 위해 돌아가고 있다고.
"아.. 하하.."
웃음이 날 수밖에 없다. 악마가 와도 이건 인정해 줘야 한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
"오늘 한... 세 군데만 돌아볼게요. 너무 많이 가는 것도 안 좋을 거 같아서.."
"그럼, 어느 전시 갈 거예요? 사실 저 전시 보는 거 처음이에요."
"그림 위주로 보려고요. 괜히 조각 비평 했다가 제 살 파먹기 할까 봐.. ㅎㅎ"
"그럼 뭐야. 난 내 살 파 먹어요??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했다. 그녀의 눈웃음이 유난히 귀엽다. 너무 좋다. 하지만 티를 내서는 절대 안 된다. 난 학생 회장으로서 신입생을 도와줄 의무를 다하러 이 공간에 있는 것이고 이 시간을 쓰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오면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을 거꾸로 내려가는 것을 선호한다. 그게 조금 덜 걷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녀를 데리고 종로 3가에서 내린다. 왜냐하면 조금 더 걸어야 한다. 그러고 싶다.
"다리 아프면 이야기해요."
"저 잘 걸어요. 다리 두꺼운 거 보이죠?"
"그래요. 그럼."
"뭐야. 인정하는 거예요?"
"아.. 아니.."
참 성격 좋다.
아무 전시장이나 가면 안 된다. 미대 경력 2년에 비춰 보면 작가가 상주해 있는 전시를 가야 그 작품에 대해 작가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나하나 들어가 보면서 작가가 있는 곳을 찾았다. 김희석...? 나이가 지긋하신 분의 전시였다. 초록색 계열로 도시를 그리는 작가였다. 특이한 것은 그림들이 모두 10호 정도로 작았다. 그림이 참 오묘했다. 그녀는 동물원에 처음 온 5살 아이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왔다 갔다 열심히 그림을 보고 있다. 그림에 코가 닿을 듯 위태한 그녀를 불렀다..
"저.. 상아..."
야 라고 해야 할지, 씨 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녀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나에게 온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희는 한종대학교 미술대 학생들입니다. 저희가 지금 미술비평 수업 때문에 작가님 이야기를 조금 듣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작가님들에게 하는 첫인사와 질문은 언제나 떨린다.
"나 까려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훅 치고 들어 온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하하하 농담이야. 창규 교수는 잘 지내?"
"예? 교수님을 하세요?"
"어. 동기야"
역시 세상은 날 위해 돌아간다. 그녀는 내 옆에서 무슨 상황이지? 하는 듯이 큰 눈을 소처럼 껌뻑거리기만 한다.
"저 3번째 그림 보이지. 그거 너네 학교야. 내가 다닐 때 너네 학교."
"어? 저희 선배님이세요?"
맞다. 우리 교수님도 선배님이다.
"응. 세상 참 좁지? 그래서 난 작게 그려. 나때 학교는 초록색이 참 많았어. 근데 지금 건물이 많아졌더만."
학교 앞 빨간 자판기에서 보면 나무가 참 많구나 생각을 했었는데 예전에는 더 초록초록 했나 보다.
작가님은 예전 학교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그리고 녹색을 쓰는 이유와 방법도 이야기해 주셨다.
그녀는 내 옆에서 받아 적기 바빴다.
"여학생은 1학년 인가 봐?"
그녀가 깜짝 놀란다.
"어떻게 아셨어요?"
"1학년은 뭘 막 적어. 그리고 그림을 볼 때 코를 박고 분석을 해. 근데 3학년 즈음 되잖아? 안 적어."
나는 나도 모르게 크크크크 웃음이 나왔다.
"둘이 캠퍼스 커플이야? 옷이 똑같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좀 다른 콘셉트 없어?"
"아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옷이..."
나는 변명을 하기 바쁜데 그녀는 웃기만 한다.
작가님에서 유료 그림 모음집을 선물 받았다. 그걸 보물처럼 들고 있는 그녀가 신기한 듯 먼저 앞서 건물을 빠져나가는 나에게 묻는다.
"와.. 학장 이런 거 많이 해 봤나 봐요? 엄청 잘한다. 이런 것도 막 선물로 받고.. 너무 신기해."
"저 학생회장입니다. 괜히 회장이 아니지요. 하!"
원희랑 신입생 때부터 얼굴에 철판 깔고 열심히 인사동을 돌아다닌 보상을 받는 것 같다.
김희석 작가님 이후로 2개의 전시장을 더 갔으며, 한 분과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벌서 오후 4시다.
하늘이 계속 꾸물꾸물하더니 이네 빗방울이 떨어진다. 주말이라 그런지 소풍 나온 가족들, 연인들, 외국인들이 많다. 하나하나 우산이 펼쳐진다. 커피집들은 모두 만석이다. 큰일이다. 길거리에서 비를 맞을 것 같았다.
쿠구구구궁!!!! 천둥이 친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쏴아!!!!!!!!!!!!!! 소나기다!!!
편의점의 작은 천막으로 그녀와 함께 몸을 숨겼다. 그녀는 김희석 작가님의 작품집을 꼭 안고 있다. 나는 그 작품집을 뺏어 내 가방에 넣었다. 가방 안에는 투명 파일 두 개가 있었다.
'그래 이거다!'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로 일단 머리만 가려요. 저기 건너편에 '주전자'라는 가게 보이죠? 저기 가서 밥이라도 먹으면서 비 그 칠까지 기다려요."
그녀와 난 그 투명 파일로 머리만 가린 채 뛰었다.
뛰면서 뒤를 보니 그녀는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웃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과 핑크색 그녀의 옷이 하나의 그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