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돌
미술비평이란 수업을 신청 하였다. 우리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공통 수업이다. 누군가를 또는 어떤 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이 꽤나 멋져 보였다. 꼭 내가 교수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우리 학교 출신 대 선배님이다. 지금은 작가이다. 그분과 친해 지고 싶어서 신청 했다 하면 거짓은 아니다. 첫주는 수강 신청 수정 기간이었기에 출석을 안해도 상관 없었지만 그 수업을 꼭 듣고 싶었기에 첫 수업은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빠졌다. 우리 학교 출신인 선생님은 다행히 흔쾌히 허락 해 주셨다.
학기 첫주는 학생회가 정말 바쁜 시간이다.
두번째 수업.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배들이 인사를 한다.
"오빠 안녕하세요 ~"
"어...... 안녕.. 어.. 어???"
그녀가 앉아 있다. 1학년이 이 수업을 듣는다고? 시간표가 맞나?? 나를 본건지 못 본건지 안본건지 그녀는 책상 위에 있는 공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만 있다.
수업이 끝난 후 학생회실에 앉아 이번 주 시간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우리과에서는 학생중에는 권력 2인자, 내 바로 밑 연보라 부회장이 학생회 실로 들어 온다.(4학년은 남이나 다름 없었다. 다들 바빠 보이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오빠 안녕. 오빠 근데 그 차상아 있잖아요. 1학년.."
"어? 어.. 그런데?"
"우리과이긴 한데...아.. 3살 많아서요.. 언니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불러야 돼요??"
"언니라고 하면 되지 뭐 어려워?. 예전에 누나들도 나이 많은 후배한테는 다 언니라고 하던데? 너도 알잖아."
"그건 그런데...그럼 그 언니는 우리한테 뭐라고 해야 돼요?"
그녀와의 첫 대화가 생각이 났다.
'에이 그래도 선배인데. 당분간은 선배라고 할게요'
그녀의 편이 되고 싶었다.
"선배라고 하다가 조금 시간 지나면 이름만 불러도 되지 않을까?"
보라의 대답이 걱정 되었다. '그건 아니죠' 라고 할까봐...
"그쵸? 좀 친해지면 그러는 게 우리도 좋겠죠?"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치.. 입장 바꿔 생각하면.. 그 차상아도 뭔가 사정이 있어서 늦게 온것 뿐인데..."
조심해야 한다. 말 조심 해야 한다. 보라가 오해하면 안된다. 아니 의심하면 안된다.
"오빠 근데 그 언니.."
"어? 어..."
"자취 한다는데요? 다른 과 신입생이랑. 나이가 있어서 기숙사 못했나?"
"야. 그럼 나도 나이 많아서 기숙사 못간거냐?"
"아니.ㅋㅋㅋ 어쨋든 이번달 총회 언제 할거에요?"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그녀도 자취생이다. 횡성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자취를 할 수 밖에 없겠지.그녀의 횡성집이 궁금했다. 소를 키울까?? 같이 자취한다는 다른 과 신입이 궁금했다. 친동생? 친구? 그냥 자취 메이트?
다 궁금하다.
총무인 효선이에게 문자가 왔다.
-오빠. 오늘 서양화끼리 신입 환영 할건데 올래요?-
아. 큰일이다. 오늘 조각 신입환영 간다고 했는데..
머리가 복잡한데 손은 아주 정확하게 문자를 보내고 있다.
-응. 가야지. 조각 신입 환영 갔다가 바로 갈게-
이게 무슨 짓이지?? 미술과 대표학생이지만 난 조각 소속이다. 서초구청장 출신이자 서초구에 주소를 두고 있는 시장이 강동구 모임에 간단다. 서초구민들은 잠깐 보고.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고등학생때 미술학원에서 한 연애라고도 하기 민망한 연애 이후 이런 감정은 굉장히 낮설다. 느낌이 다르다.
“야 학장. 너 서파(서양화 파트) 신입환영 간다며. 여긴 안 챙겨?”
소식 참 빠르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를 곁에 두려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가 여기 조파(조각파트) 모임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다 챙겨야지. 얼굴만 비추고 다시 올게..”
올게… 아니 미안해. 못 올 거 같아..
이미 난 선거를 통해 뽑힌 민주 대학생의 학생 대표인데도 내 유권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모두를 아우르는 유권자를 잊지 않는 선출자이다. 라는 건 가면이다. 지금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되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조각과 후배들과 잠깐 나온 4학년 선배 형에게 인사를 한 후 효선이에게 문자를 한다.
-지금 나와서 가고 있어. 분위기는 어때?-
-이제 막 올랐어요. 빨리 와요. 오빠-
작년 총무 때 같았으면 서양화 모임에 가서 술값이 얼마가 나왔는지, 얼마나 더 안주를 먹을지만 생각을 했다. 학회비는 얼마나 남았지? 조파랑 맞춰야 하는데? 이런 생각만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름하고 얼굴 그리고 짧은 정보. 횡성, 동갑, 자취, 이것 밖에 모르는 그녀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다.
딸랑딸랑~ 문에 달린 종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모두에게 알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술집의 음악은 내가 오던 말던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자기 노래만 큰 소리로 부르고 있어서 아무도 내가 온지 모르는것 같다.
창가 옆. 작은 테이블을 따닥따닥 붙여 놓고 시끄럽게 떠드는 무리가 보인다. 효선이가 보인다.
“다들 적당히 먹고 재밌게 놀아. 3학년들은 후배들 잘 챙기고.”
“네에~~~”
초로색 병 울타리에 갖힌 양들 같다. 메에~~~
서파도 마찬가지로 뭐 대단한 사람이 나타난것 마냥 나를 반긴다. 그 반가움을 다 느끼기에는 내 눈이 너무 바쁘다. 그녀를 찾고 싶었다.
안보인다.
“차상아 어디 갔어? 안왔어?”
텔레파시로 효선이에게 묻는다. 효선이는 내 텔레파시가 안들리는 것 같다. 음악 소리가 커서 내 텔레파시가 잘 안들리는 듯 하다.
딸랑딸랑~.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내가 방금 울렸던 종소리가 한번 더 들린다.
그녀다.
“언니~~!!”
언니? 효선이가 언제 차상아랑 친해졌지?? 보라가 얘기 해 줬나?
효선이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차상아의 눈이 나와 마주친다. 효선이게 하는 인사보다 꺽이는 목의 각도가 좀 작다. 그 작은 인사의 각도가 왠지 좋다. 나 다음으로 들어 온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신의 장난인가?‘
이 타이밍을 만들어 준 신에게 투정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안녕하세요. 선배. 선배도 늦게 왔나봐요?”
왔나봐요? 오셨나봐요가 아니라?
“아.. 어..”
그녀의 말은 나에게 향한거 같지만 그녀의 눈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시끌시끌. 너무 시끄럽다. 메탈리카와 판테라, 마릴린 맨슨을 좋아하는 나도 이 시끄러움은 너무 힘들다. 옆에 앉아 있는 그녀가 신경이 안쓰일 정도로 너무 시끄럽다. 나가고 싶었다.
딸랑딸랑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담배 한 개비를 물려고 하자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학장!”
그녀다.
“왜 나왔어요?”
“아. 너무 시끄러워서 잠깐 나왔어요. 왜 나왔어요?”
“옆에 있는 사람이 나가길래 그냥 따라 나왔어요”
그 나중이 지금인가? 지금 물어봐야 하나? 뭐 부터 물어 봐야 하지? 그런데 물어 봐도 되는 건가?
초록색으로 바뀐 신호등을 보고 그녀가 말한다.
“학장. 우리 건너서 이야기 해요”
그녀가 뛰길래 오른손에 담배를 든 나도 덩달아 뛴다.
신호등이 빨간색을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랑 계속 같이 흰색 선 안에 있을 수 있게…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그녀는 말없이 정류장 의자에 앉는다. 나도 옆에 앉는다.
“어디 다녀 왔어요?”
나보다 늦게 온 그녀의 이유가 궁금했다.
“그냥.. 천천히 오고 싶었어요. 애들 약간 취했을때 오면 난 좀 덜 마실 수 있잖아요?”
현명해 보인다.
“학장은 어떻게 학생 회장이 됐어요?”
빈말로 한것 같은 질문에 진지하게 난 대답을 한다.
“1학년때 학년 대표를 했어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술 마실때 끝까지 있었다고… 그러고 군대 다녀와서 총무를 했어요. 작년 회장형.. 아 모르죠? 그 형이 총무 하라 하더라고요. 뭐 하라니 했죠. 형이 4학년 되면서 나보고 회장 하라 하더라고요. 교수님 허락도 다 받았다고. 그런데 투표를 해야 하잖아요. 다들 나 뽑아 줄지 정말 몰랐어요. 그때 상대가 누군지 알아요? 보라에요. 연보라. 2년 같이한 동기를 뽑아줄 줄 알았는데 날 뽑아 주더라고요. 뭐 그래서 학생회장이 된거죠. 모르겟어요. 왜 날 뽑았는지. 끝날때 물어 보려고요. 애들한데..”
나의 군대를 포함한 4년 학교생활을 1분도 안돼 이야기 했다. 너무 짧다.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제는 내 차례다. 지금이다. 나중이 지금이라고 난 판단했다.
“왜 이제야 대학을 왔어요?”
“공부를 해서 대학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잘 안되더라고요. 난 그림 그리고 싶은데…”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대학 다 떨어지고 부모님과 좀 싸웠어요. 아니. 나 혼자 싸웠어요. 엄마랑 아빠는 천천히 해도 된다 했는데 난 그 천천히가 한번 더로 들렸어요. 싫었어요. 부모님은 그림을 왜 대학가서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셨거든요. 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돈 주면서 그런 걸 배우냐 하셨지요. 엄마랑 아빠는 제가 과학자가 되기를 바랬거든요.. 뭐 그래서 아무것도 안했어요. 마트 같은데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용돈이나 벌었죠. 그런데 하루, 한달, 1년, 2년이 지나니 돈이 모이더라고요. 순간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이제 어른인데, 나도 돈이 있는데, 나도 이제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데.. 그래서 엄마한테만 이야기 하고 무작정 집을 떠났어요. 이모 집에서 살면서 미술 학원을 다녔어요. 이모 딸이랑 같은 대학을 와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붙었는데도 못 왔을 거에요. 지금은 그 동생이랑 같이 살아요. 동생은 국문과 다녀요.”
나는 4년을 1분안에 이야기 했는데 그녀가 말한 1분은 나에게 4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