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돌
휴대폰 알람이 또 운다. 매일 아침 듣는 이 소리가 이제는 지겹지도, 싫지도 않다. 너무 익숙해졌다 랄까? 마치 몇 년 전 학교를 가야 하는 나를 깨우는 엄마의 비명 소리처럼 마냥 당연한 듯하다.
'오늘 무슨 요일 이더라... 오늘 수업이...아! 미술비평.'
누가 보더라도 세수는 했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만 씻고, 누가 보더라도 빨래는 하고 다니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옷만 입고 집 밖으로 나선다.벚꽃 나무는 벌써 초록색이 되어 가지만, 나무가 있는 그 길 바닥은 아직 남아 있는 꽃잎 덕분에 핑크색이다. 저번 주 생각이 난다.
학교 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도착을 한다. 하지만 오늘은 좀 오래 걸릴 것 같다. 다리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어제 축구들 너무 열심히 했나보다.
내가 있어야 할 미술대학 건물은 학교 끄트머리에 있다. 왜 구석에 박아 놓았는지 신입생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미대생들의 모습을 가려야 했기에 잘 안 보이는 곳에 넣어 놓은 것 같은 합리적인 의심이 3학년이 된 지금 든다. 무거운 다리를 가지고 학교에 도착한 나는 내 아침 루틴인 빨간색 자판기 믹스 커피를 뽑고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인 후 건너편 나무를 무심히 보는 척하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신입생 파일에서였다.
우리 미술과 학생회 회장인 나는 조교 선생님에게 신입생들의 간단한 신상과 사진이 있는 파일을 받았다.
"애들 잘 보고 잘 관리해."
"네. 근데 이번에도 여학생이 더 많겠죠?"
"차라리 여자 축구팀을 만드는 건 어때?"
"선생님도 같이 하실래요?"
조교 선생님은 '됐네요'라는 듯한 뻔한 미소로 답을 한다.
아무래도 미술대학이다 보니 여자가 항상 더 많았다. 남중, 남고를 나온 나 이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같이 축구나 농구를 할 남자 학우들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있던 남자 선배, 후배는 군대를 가거나, 군대를 가기 위해 휴학을 하였다.
학생회 사물실에서 부회장 보라와 총무 효선이랑 같이 신입생 파일들을 보며 그들의 주소부터 파악을 하였다. 올해는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차상아...'
그 여학생이 눈에 띈 이유는 외모가 아니었다. 물론 너무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미술을 전공하면서 많은 여학생들을 보았고 작년에 총무일을 할 때도 신입생 명단을 보면서 기대했던 여학생들은 다 사진과 달랐기에 사진을 보고 지레 상상하지 말자는 규칙이 생겼다.
내 눈을 끌게 한 것은 그녀의 주소와 생년월일이었다. 주소는 강원도 횡성, 나이는 나랑 동갑??
대학을 가기 위한 입시 미술은 지방 소도시에서는 하기가 많이 힘들다. 다들 대도시에 나가 경쟁을 하며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강원도 횡성? 그럼 이 여자는 부모님과 떨어져 입시를 한 여자일 확률이 크다. 시골 동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르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그런데 나랑 동갑? 나랑 나이가 같은데 이제 신입생이라면 동급 신입생들보다 5살이 많은 거다. 이런 신입생은 처음이라 별의별 상상이 다 든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그런? 부모님을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주인공? 혼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공부를 하고 그림을 그려 드디어 미술 대학에 온 주인공?
'뭐지... 희한하네... 왜 이렇게 늦게 대학에 온 거지? 궁금하네...'
3월의 첫 강의가 있는 날.
신입생들을 모아 놓고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자리였다. 진행은 내가 하여야 했다.
미술대학 건물 앞에 신입생들이 모였다. 보라와 효선이는 신입생들의 출석을 열심히 체크하고 있다.
나는 그녀를 그곳에서 처음 보았다.
세상에 그런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녀는 너무 예뻤다. 고등학생 시절 수 없이 그려오고, 만들어 오던 비너스가 현대적인 학술로 해석하면 나올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신입생 파일에서 봤던 그 사진은 가짜였다. 카메라가 잘못했다.
3월의 햇빛은 그녀를 반짝이게 했다. 6월의 햇빛이 모래사장의 모래 알갱이를 반짝이게 하듯이 햇살은 그녀의 머리카락, 얼굴, 심지어 그녀의 검정색 잔스포츠 가방까지 빛나게 했다.
그녀는 벌써 아이들과 친해 졌는지 종알 종알 떠들고 있다. 웃는 모습이 많이 예쁘다고 느껴진다.
그녀와의 첫 대화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와 처음 대화를 나눈 곳은 학교 건물 앞 빨간 자판기 앞이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일찍 학교에 올라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저쪽에서 그녀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녀도 수업이 있는지 아침 일찍 온다.
"안녕하세요. 선배"
언제 만난 적이라도 있었던 듯 그녀는 꼭 친한 사람처럼 인사를 건넨다. 아. 그녀는 날 자주 봤겠구나. 난 학생회장이니까.
이상하다. 그녀의 인사에서 향기가 난다. 매일 유화 물감 냄새와 화학약품 냄새만 맡아서 코가 이상해진 걸까?
그건 아닌 거 같다. 향기가 코로 안 들어오고 눈으로 들어온다.
"아... 어... 근데, 보니까 나랑 나이가 같던데 선배라고 안 해도 돼요."
"에이.. 그래도 선배인데. 당분간은 선배라고 할게요"
'성격 참 좋네...'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아니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그런데 진짜 예쁘긴 하네....
신입생 환영회에서 그녀와의 두 번째 대화가 이루어진다.
선 후배 사이에 술이 한두 잔 왔다 갔다 하고 어느새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학생회장인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여야 한다. 4학년과 대학원 선배들과 교수님들의 수발도 들어야 한다.
후배들과 선배들이 따라주는 술을 마다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난 학생회장이니까. 하지만 절대 취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난 학생회장이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아르바이트를 가야 하는 아이들은 아르바이트를 가고, 오바이트를 해야 하는 아이들은 화장실을 갔고, 집에 가야 하는 아이들은 집에 갔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몇몇 선배라는 아이들과 학생회 임원들 그리고 몇몇 신입생들이 큰 테이블 하나로 자리를 옮겼다. 다행이 그녀도 있다. 이제부터는 나도 이 시간을 즐기고 싶다. 피곤하지만 집에 가고 싶지는 않다. 왜일까?
말수가 별로 없는 나는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고 그에 답하듯 웃기만 한다. 선배들이 해 주는 강사 선생님들과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반짝반짝 듣고 있는 신입생들 사이에서 그녀가 보인다. 먼저 말을 걸고 싶지만 다른 아이들이 오해 할 것만 같다. 그리고 말할 용기도 없다. 내 눈은 서양화 전공 학생들의 장점들을 떠들고 있는 보라에게 향해 있지만 귀는 보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녀를 향하고 있다.
"선배는 어쩌다 그림 시작 했어요?"
"어???"
어느새 내 옆에 앉게 된 그녀의 첫 질문이다. 여 학우들 사이에서 2년을 보내 보았지만 여자의 질문으로 내 심장이 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중 남고를 나오다 보니 미술대학에 가면 예쁜, 멋진 여대생이 가득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욕을 하고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고 대충 대충 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을 보니 환상이 깨졌다. 그런 행위들이 싫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미대생을 상상한 것 뿐이다. 내가 상상한 미대생은 그것이 아니었다. 기대가 컸던 걸까? 여학생들은 그냥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학생들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 어떤 여학생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동기와 오빠 후배 그 이상 이하도 없었다.
대학 캠퍼스 달달한 연애는 나에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였다.
실제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내가 할 수도 없다.
"난 조각인데.."
"아, 그러네"
우리 과는 조각과 서양화 두 파트가 있다. 그림으로 입시를 시작 하였지만 조각이라는 분야에 눈을 떠 이쪽으로 전향을 하였다. 조각과는 테스토스테론 덩어리 과였다. 이런말을 4학년 누나들은 싫어하지만 조각과는 괸장히 테토스러운 과이다. 돌, 나무, 흙등 자연을 재료삼아 하는 예술분야이다. 재료 특성상 큰 물리적인 힘이 필요한 과이다. 너무 멋진 예술분야다. 마음은 그림이었지만 몸은 조각이었다. 하지만 난 그림도 좋아한다.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도 그림과 조각을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에 선택을 하였다. 복수 전공을 하고 싶어 교수님을 찾아 갔지만 시간표도 안 맞고 나는 너무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두마리 토끼 다 못잡을 거라 하시면서 말리신다.
"나중에 서양화 대학원 원서 넣어봐."
무슨 뜻이죠? 교수님?
만질 수 있는 조각이 좋았다.
만들 수 있는 조각이 좋았다.
각종 위험한 기계로 미술을 한다는 아이러니가 좋았다.
질문이 온 김에 이때다 싶어 나도 질문을 보냈다.
"왜 이제야 대학에 왔어요? 나랑 동갑 이던데"
대답이 너무 궁금했다.
"얘기가 길어요. 나중에 이야기해 드릴게요"
나중에.. 나중에... 무슨 뜻이지? 나중에 또 보자는 건가? 나중이면 언제? 이따 나가서? 내일? 주말에?? 어디서? 학교에서? 식당에서? 아니, 이 술집 또 와야 하나?
빅뱅이 일어났다. 그런데 1초 만에 농업 혁명과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온라인 세상이 판치는 데에는 0.1초가 걸렸다. 나중에 라는 한마디는 1.1초 만에 나만의 문명이 완성 돼 나가고 있었다.
아니. 나중에 라는 한마디가 1.1초 만에 사랑을 만들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아직 사랑은 아닌 것 같다. 설렘이다. 설렌다. 나중에 올 그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