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돌
다행히 '주전자' 이곳은 사람이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긴 술집이다. 예전에 원희랑 여기서 막걸리를 옴팡지게 먹고 쓰러졌던 기억이 있다.
"와.. 비 올 줄은 몰랐어요. 학장은 알았어요?"
알고 있었다.
"아뇨. 몰랐어요. 뭐.. 밥이라도 먹을래요? "
우선 내 계좌에 얼마가 있는지 차분히 기억을 해 봤다. 여기서 밥을 살 정도의 여력은 다행히 있다. 그리고 내일 엄마에게 용돈을 조금 받을 거고, 다음 주에 저번에 한 인테리어 아르바이트 정산을 받는다. 아직은 여유가 있어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근데 여기 술집 아니에요?"
"아. 예. 뭐 안주를 밥처럼 먹으면..."
"미대생들은 술이 밥이에요? 뭐 맨날 술만 마셔요? 제 동생 있는 국문과 보다 많이 먹는 거 같아."
"국문과는 술 취하면 글씨를 못 읽잖아요. 서양화는 술 취하면 붓이 막 움직여요."
"뭐야... 그럼 조각은? 뭐 술 마시면 그라인더가 막 돌아가요?"
"조각은.. 술 마시고 그라인더 돌리면 손 잘려요..."
"웩!!...."
그녀와의 대화가 예전과는 다르게 술술 풀리는 느낌이다. 이 느낌 나쁘지만은 않다. 뭔가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녀도 그럴까? 그럴 거라 믿는다.
"학장은 뭐 먹을래요?"
"전 뭐 아무거나.."
"남자들은 맨날 아무거나래. 그럼 내 맘대로 시킬게요"
남자 경험이 많은가 보다. 남자의 마음을 아는 거 보니. 그녀와 대화할수록 나만의 에스퀴스가 만들어지는 거 같다. 정신을 가다듬자. 나는 지금 이 차상아 신입생과 데이트나 썸을 타러 온 것이 아니라, 과제를 하러 온 것이다. 그 이상의 쓸데없는 상상이나 대화는 하지 말자. 나는 학생회장이다.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오징어 볶음이랑 막걸리 시킬게요"
"술 마시게요?"
"비 오잖아요."
반박을 할 수가 없다. '비 오는 날은 막걸리'라는 주도의 이론을 만들어 주신 선대 조상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새빨간 오징어 볶음과 뽀얀 베이지색의 막걸리가 갈색 항아리에 담겨 나온다.
그녀가 먼저 작은 조롱박으로 내 그릇에 막걸리를 퍼 준다.
"학장은 미술이 좋아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다.
"네 좋죠. 재밌어요. 신기하잖아요. 정답이 없다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답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 그럼 상아.. 씨... 는 재미없어요?"
깔깔깔 그녀가 웃는다.
"상아 씨가 뭐예요. 말 나온 김에 우리 이제 말 놓으면 안 돼요? 동갑이잖아요."
"아 그래요.. 그럼."
"근데 나는 학장이라고 부를래요. 그게 편해요. 학장 이름 부르면 왠지 다른 사람 부르는 거 같을 거 같아요"
"그래요.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이제 존댓말로 하지 말아요. 적어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사적인 자리? 심장이 또 콩닥콩닥 뛴다. 우리 지금 사적인 만남인 거야?? 아니야. 우리 지금 과제하러 온 거야. 과제하러 온 거면 사적인 거 아니야? 혼돈에 빠져 있을 때 그녀가 정리해 주는 말을 한다.
"학교에서는 선배잖아요. 학교에서는 존댓말 할게요. 아니할게 ^^"
나에게 친구처럼 말하는 그녀를 보니 심장이 두배로 더 빨리 뛰는 느낌이다. 오징어 볶음 아직 안 먹었는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 그녀가 말을 이어한다.
"나도 그림이 좋아요. 그런데 한 달 동안 미대를 다녀 보니까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또 들더라고... 내가 생각한 미술이 아닌 거야. 엄마가 말했던 아무 데서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러 온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아직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예전에 내가 신입생때 하던 고민을 똑같이 하고 있다.
"나도 똑같은 고민 했었어요. 내가 상상하고 생각했던 대학이 아니더라고요. 나는 막 멋있는 조형물 만들고 막 멋있게 작업하는 모습 상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대학생 되면 네가 원하는 수업 들을 수 있다. 라고 알고 있었는데 꼭 그런것도 아니고.. 원하는 수업을 들어도 성적이 메겨지고.. 난 또 3점이니 4점이니, 6학점이니 몇 학점이니 하는 숫자에 또 갇히더라고요. 난 미술 하고 싶어서 왔는데 미술은 안 하고 또 공부하더라고요. 외우고 대입하고... 그런데 상아 씨.. 아니, 상아야. 조금 더 해 보니까 알겠더라고. 1학년때 하는 그런 고민들마저 나중에는 도움이 된다는 걸.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내가 싫어하는 게 뭔지 찾아가는 과정이더라고. 2학년, 3학년 되면 네가 싫어하는 것들을 정확히 알게 될 거야. 그 반대로 뭐가 네가 좋아하는 건지도 찾을 거고. 지금은 그걸 찾는 동안이라서 모르겠는 거고. 알잖아 현실은 상상하고 다른 거. 나도 실은 1학년때 학사 경고 맞을 뻔했어. 수업이 재미가 하나도 없더라고. 상상만 하느라 현실을 놓쳤지. 그런데 2학년 때 창규 교수님 만나고 돌을 시작했어. 그때 그 맛을 알았고, 재밌게 해서인지 인정받고 지금은 회장 됐잖아.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게 되니까 재밌어지고 더 깊어지더라고."
"학장 말 되게 잘하네?? 진짜 놀랍다. '어' 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 그런가?.."
괜히 부끄럽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녀 앞에서 말이 술술 나왔다.
그녀와 가볍게 그릇을 부딪혔다. 막걸리를 꼴깍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랑 아빠는 축산업 쪽에서 일하셔. 소를 키우는 건 아니고.ㅎ 그래서 우리 엄마랑 아빠는 내가 유전학 쪽으로 가길 원하셨어. 나도 엄마가 좋하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을 했어. 그래서 나도 당연히 그쪽으로 갈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때 클림트 그림을 본 적이 있어. 너무 황홀하고 예쁜 거야."
"구스탐프 클림트? 키스?"
"응 맞아. 그 그림을 본 이후로 DNA 꽈배기만 봐도 그 그림이 생각이 나더라고. 우리 학교는 조그마한 학교라서 미술실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어. 미술선생님은 있었지. 다행히. 무작정 선생님 찾아가서 선생님한테 이야기했어. 선생님 저 클림트 그림 좀 보고 싶어요. 미술선생님이 네가??라는 표정을 날 보더라고. 선생님이 그림책 하나 주시더라고. 서양그림이 모여 있는 그런 그림책. 그 책이 부모님과 나의 싸움의 도화선이었어.
아빠가 이런 거 봐서 뭐 하냐고 차라리 진화론 그림책을 보면 이해라도 하겠다고.. 와... 그 말이 난 정말 너무 싫더라고. 내가 아빠한테 처음으로 소리 지른 말이 뭔지 알아? "누가 한데??!!"야. 그런데 하고있어 ㅎ...정신 차리고 공부나 하라고 아빠가 그러더라고. 모르겠어. 그때부터 반항이 시작 됐나 봐. 머리에는 계속 그림이 왔다 갔다 하는데 생물책이 눈에 들어오겠냐고... 수능 망쳤지 뭐. 학장아 그래도 나 공부는 좀 했다?"
"어? 나랑 동갑이니까 같이 수능 봤네. 몇 등급 나왔는데?"
"나 그래도 모의고사는 1,2등급은 항상 나왔어."
입에 있던 막걸리를 그녀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 그녀가 건네주는 휴지를 받으며 나는 말을 이었다.
"엄마 아빠가 반대할 만한 이유도 있었네..."
"그렇지.. 엄마의 마음도, 기대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어.."
"그럼 그림은 언제 시작한 거야?"
"작년 2월에."
"어?? 1년 준비한 거야?????"
"응."
"와 대단하다.. 소질 있었나 보네."
"아냐. 간신히 들어왔어. 그나마 수능을 좀 잘 봐서.. ㅎ"
그녀와 깊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거 같아 부담스러웠다. 이런 이야기는 원희랑도 해 본 적이 없다. 원희랑은 만날 때마다 과제 이야기, 오토바이 이야기, 군대 이야기만 했다. 보라랑은 과 이야기 밖에 안 했다. 효선이랑은 돈 이야기 밖에 안 했다.
"그럼 상아 너는 대학 와서 뭐 해보고 싶었어?"
"오늘 했어."
순간 얼굴이 또 뜨거워진다.
"나 미술관이나 이런 전시 꼭 와보고 싶었거든.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었어. 근데 작가들이랑 이야기도 하고 작가에게 선물도 받았어. 오늘 진짜 상상도 못 한 최고였어."
그녀가 환히 웃는다.
웃지 마라.
나 사랑에 빠질 거 같다...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부르고 취기가 살짝 올라왔다.
"더 마실래요?"
"아니 난 그만 마실래. 학장 너는?"
"나도. 상아 너는 술 잘 마시나 봐?"
"내가 어디서 아르바이트해서 돈 모은 줄 알아?? 횡성에서 소고기 썰던 아저씨들이랑 일했어.. 매일 같이 소고기에 술 마시던 여자야 ^^ 아빠 닮았나 봐. 아빠 술 취한 걸 못 봤어."
이 여자에게 술 마시자 하면 안 되겠다.
"그럼 이제 일어날까?"
나는 계산대로 향하며 내 지갑을 꺼냈다. 내 손목을 그녀가 잡는다. 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뭔 학생이 돈이 있다고... 학장, 오늘은 내가 살게. 나 작년까지 돈 벌던 사람이야."
당황스러워서 말도 안 나온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이 잠깐 역 회전을 하는 느낌이다.
"어... 그래.. 고마워. 잘 먹었어."
다행히 비가 그쳤다. 비에 젓은 아스팔트에서 도시의 냄새가 올라 온다. 그녀는 고인 빗물을 피해 검정색 운동화를 신고 폴짝 폴짝 뛴다.
학교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그녀가 말을 건넨다.
"학장. 이거 리포트 쓰는 거 어떻게 하는 거야? 학장은 이런 거 잘할 거 같아."
그렇다. 그녀는 이런 과제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어떻게 설명을 해 줘야 할까..
"어.. 우선 육하 원칙에 맞춰 쓰는 걸 추천하고, 느낀 점이랑 생각한 점 쓰고.. 아무래도 비평 수업이니까 소신 있게 쓰는 것이 좋을 거 같아.. 물론 예시 사례나 반대 사례를 넣는 것도 중요할 거 같고."
"여윽시! 학장 멋지다. 그럼 내 거 봐줄 수 있지?"
'내가? 그녀의 과제를?? 뭐?? 말이 돼?'
"어..... 그래.."
맙소사.. 받지 말아야 했다. 내거 해야 하는데..
"근데 학장. 내가 왜 그 수업 듣는지 안 궁금해?"
맞다. 궁금했다.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어.. 왜 이 수업을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