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첫 문자

물감과 돌

by 도겸

"언니~ 어디예요~~ 빨리 와요~~"

그녀의 전화기 너머로 누군가가 그녀를 부른다. 누군지 알게 되면 가만 안 둔다. 이 시간과 공간을 뺏어가다니.. 용서하기 싫다.. 학생회장의 이름으로 널 응징하고 싶다!!


띠리리리~띠리리리~ 신호등의 초록색 불이 깜빡 거린다.

"빨리 건너요. 다음에 더 이야기해요~"

다음에? 다음에? 그녀와의 대화가 빨간불이 되지는 않은 것 같다.

나중에서 다음에. 다음에는 뭘까? 어디일까?


그녀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그림을 그리지 못했고,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을 왔다. 그래서 늦게 왔다. 지금은 사촌 동생과 같이 자취를 하고 있다.

굉장한 성과이다.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은 많이 수그러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알려주고 싶었다는 욕심이 생긴다.




3월이 흘렀다.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회장형이 하는 것을 보기만 했지 막상 해 보니 시간이 번개처럼 흐른다. 하지만 아직 기획해야 할 일이 많다. 전시도 준비해야 하고 지옥의 M.T도 준비해야 한다.

신입생들도 이제는 제법 대학생들 같았고, 나를 선배님이라 하지 않고 학장 오빠라 부른다.

그녀는.. 아직까지 날 부른 적이 없다.

그녀와 나는 파트가 다르기 때문에 미술 비평 수업처럼 공통 수업이 아니면 수업으로 마주 칠 일이 없다. 더군다나 그녀는 1학년 수업을 듣고, 나는 3학년 수업이다. 1학년인 그녀가 왜 고학년 수업을 듣는지 모르겠다.


나는 1층에서 돌을 깎았고, 그녀는 2층에서 물감을 짠다. 나는 돌조각이 전공이다. 그리고 그녀는 서양화 전공이다.


수요일에 하는 미술비평 강의가 기다려진다. 그녀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물론 뒷모습 밖에 볼 수 없다.

임재순. 미술 비평 선생님이다. 이 분의 작업을 처음 본건 1학년 때이다. 학교 졸업생 특별 전시회에서 그분의 작업을 처음 보았다. 인간의 내면을 작업하는 작가였다. 노란색을 많이 쓰는 작가였다. 그리고 가시나무의 형태를 모티브로 잡아 스케치를 하시는 걸로 나름 유명한 분이시다. 그분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림이 너무 예뻤다. 거칠었는데도 예뻤다. 감정과 느낌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것이 어떤 건지 그때 처음 알았다.

3학년이 되어 수강친청을 할 때 미술비평이라는 멋진 강의 이름을 보았고, 강사명에서 그분의 이름을 보았다. 눈이 커졌다.

'꼭 신청해야 해!!!'

하지만 나에게만 꼭 이었나 보다. 수강 신청 인원은 여유로웠다.


"이번에 종로에 좋은 전시 많이 하더라고요. 그 전시들 다녀오시고 비평 리포트 하나씩들 써 오세요."

선생님이 내려주신 첫 지령이다. 점수를 따고 싶었다. 리포트 점수가 아닌 내 열정에 대한 점수를. 이미 나는 비평가가 되어있다.

주말에는 아무도 날 찾는 사람이 없으니 주말에 전시를 돌아봐야겠다.

수업이 끝난 후 나는 1층으로 돌아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오후에 있을 돌조각 전공 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띠링!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밥 생각 없는데 밥 먹자는 문자일 것이다. 그래도 누가 내 밥 걱정 해 주는 건지 궁금해 핸드폰을 켰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로 문자가 왔다.


-저.. 학장은 집이 어디예요??-


?? 누구지? 뭐지?? 누군데 우리 집을 물어보지??

-누구....-


띠링

-저 차상아..-


이럴 수가. 맙소사. 학과 사무실로 달려갔다. 다행히 조교 선생님이 식사 전이다.

"선생님!! 그 신입생 파일 좀요!!!!" 내 일방적인 요구에 조교 선생님은 적잖이 당황하시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캐비넷에서 노란 종이 파일에 끼워져 있는 파일을 주신다.

'차... 차... 여기 있다!!'

그 번호가 맞다.. 그녀다.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하지? 왜 물어보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게 왜 궁금한데??

수만 수천 가지 생각이 든다. 이럴 시간이 없다. 그녀가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순간, 과 사무실 창 밖으로 시선이 갔다. 그녀다. 1학년들끼리 밥 먹으러 가는 거 같다. 다행이다.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거 같지는 않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학생회 사무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핸드폰을 열어 또박또박 한 글자씩 정성껏 누른다.


- 아. 차상아. 저도 학교 근처에 살아요.


아뿔싸!! 큰일 날 뻔했다. '저도'라고 하면 나는 네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안다. 그리고 나도 그 근처 산다 라는 뜻이 된다. 될 거다. 천천히 수정을 한다.


-아. 차상아. 저는 학교 근처에 살아요. 혼자


아!! 이것도 아니다. 혼자라는 걸 왜 이야기 하나.


-아. 차상아. 저는 학교 근처에 살아요.-

미니멀리즘으로 가자. 전송을 누른다.


띠링. 답장이 왔다. 떨린다.


-ㅋㅋㅋ 아니요. 부모님 어디 사니냐고요. 원래 집.-


?? 엄마집? 그게 왜 궁금하지?? 왜?? 왜??

-아~ㅋ 부모님은 여기 서울에 계세요.- 전송.


띠링

- 근데 자취해요?

-그 좀... 사정이 있어서.. ㅎ 그런데 왜요?- 전송.

나에 대해 두 가지나 알려 줬다.


띠링.

-딴 게 아니라.. 비평 리포트 쓸려면 종로 가야 하는데 저는 잘 몰라서요. 그 수업 듣는 1학년은 저 밖에 없고..-


맙소사. 이게 뭔 신의 장난인가. 아니, 임재순 선생님이 장난치시는 건가??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맞을 거다.

그녀의 집은 횡성. 어디서 입시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서울은 아닌 듯싶다. 아니다. 서울에서 살아왔던 나도 우리 동네만 알지 다른 곳은 모른다. 더군다나 종로는 과제할 때나 가 봤지 잘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말했던 다음이 이번이다라는 직감이 든다.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하지? 대학원 선배들이 논문 준비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난 학생회장이다. 넌 신입생이다. 그러므로 난 너를 도와줄 의무가 있다. 딱 그 느낌이 나야 한다.


-그래요. 뭐 도와줄 거 있으면 이야기해요.- 전송.


너무 떨린다. 뭐라고 답장이 올까.


띠링.

-감사해요 ^^. 이따 전화해도 돼요?-


뭐?? 나한테 전화한다고?? 침착하자. 침착해. 미니멀리즘.


-내.- 전송.

아 젠장. 오타다. 네 인데 내라고 보냈다. 아 멍청해 보인다.


기분이 너무 좋다. 날아갈 것 같다. 지금 당장 작업실 가면 피에타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8인치 그라인더를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라인더의 엄청나게 시끄러운 굉음 소리가 '스팅'의 음악으로 들릴 것 같다. 오늘 하루 왠지 너무 행복할 것만 같다.


하늘이 왜 이리 파랗냐.... 구름 하나 없다.


수업이 다 끝나고 집에 왔지만 그녀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다. 안 기다리는 척 기다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다. 띠리리링~ 전화다!!!! 젠장. 내 동기 원희다.

"여보세요. 왜."

"야 집이냐?"

"어 왜"

"아니 조교선생님이 너랑 저녁 먹을라 했는데 학교에 없다길래. 쌤이 너 부르래."

아.. 그녀 전화 기다려야 하는데.. 나 스스로에게라도 안 기다리는 척 연기를 하기 위해 승낙한다.

"어.. 어디로 가?"

"학교 앞에 껍데기"

"아. 어. 금방 갈게"

거긴 걸어서 10분이면 간다. 자취를 하니 이거 하나만은 너무 좋다. 어디든지 걸어서 갈 수 있다.

껍데기 집은 벌써 웨이팅이다. 원희랑 조교쌤이 먼저 와 있어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기다렸어야 할 판이다.

드르륵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다.


왜 그녀가 원희랑, 쌤이랑 같이 있지? 어? 보라도 있네? 아니. 내가 가는 곳에 그녀가 오는 거야? 아니 그녀가 있는 곳에 내가 가는 거야? 이거 진짜 운명의 장난이야?? 신이 장난 하는 거야? 아니면, 이번엔 조교 쌤의 장난이야??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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