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멈춰 있었다

by tracebraise




여느 때처럼
저녁이 되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떠나갈 사람이라서였을까.
조금 더 내 시간을 쓰더라도
그와 하루를 나누고 싶었다.


우리는 이미 지난 11월에 헤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후로도 오래
서로의 일상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미국 이야기, 타국에서 사는 삶,
언젠가 해외에 나가 살고 싶다는 내 말.


그가 물었다.


“미국은 어때?”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미국은 별로야.
그래도 너보단 내 여권 파워가 더 세니까
내가 더 쉽게 갈 수는 있겠지.”


그러자 그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미국에서 받은 잡오퍼 메일이었다.


그것도 이미
두 달이 훌쩍 지난 날짜의.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오만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헤어지고 나서도
내가 그를 완전히 놓지 못했던 건
어쩌면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시 멀어져 있어도
언젠가는 다시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

초라해 보여도
그때의 나는 그 가능성을
조금은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메일 한 장 앞에서
나는 그제야 알았다.


너는 이미
너의 미래를 향해 가고 있었고,


나만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는 걸.


네가 졸업하고
여덟 달 동안 구직활동을 하던 동안
나도 내 나름의 격동을 지나고 있었다.


네 번 중 세 번이나 다른 업종으로 일을 바꿨고,
나 역시 나대로
버티고 흔들리고 살아내고 있었다.


나도 힘들었다.
나도 나대로 불안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와중에 너와 함께하는 미래를
아주 조금은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너는 아니었는데.


그 사실이 허탈했다.


내가 그동안 쏟았던 시간과 마음이
한순간에 갈 곳을 잃은 것 같았다.


감정이 조금 가라앉고 나서야
비로소 내 앞에 남아 있는 것들이 보였다.


두 달 전 시작한 학사 일정,
따야 할 자격증 시험,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내 감정.


나는 너무 오래
너를 중심에 두고 살아왔다.


네가 떠나면 더는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계속 나를 뒤로 미뤘다.


내 한계는 이미 한참 전에 넘었는데도
나는 끝까지
나를 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여기서 더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하면
나는 정말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조금은 미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너에게 내 에너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정말
내가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어쩌면 그날 처음으로
나는 너와 함께하는 미래가 아니라
내 앞에 남아 있는 삶을 살아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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