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갱고흐 Jun 29. 2023

01. 빼곡한 사람들 사이에서 꿋꿋이 쥐고 있던 책

출근길 마주하는 책들에 대해


이번 역은 00, 00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아침 출근길이란 여간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열차에 몸을 실을 때 비어있는 자리, 또는 조금이라도 서 있기 편한 곳을 찾기 바쁘고, 그렇게 자리를 잡으면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짓는 표정들도 다양합니다. 크게 웃고 싶은데 주목될까 봐 진지한 표정이지만 씰룩 씰룩 움직이는 입꼬리, 어려운 차트들을 보며 한껏 찌푸린 미간도 있으며, 평온한 표정으로 달콤한 잠에 빠진 사람도 있죠. 그렇게 다양한 표정들을 마주하며 생각에 잠기면 어느새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매일을 보내던 중, 콩나물 지하철에 탑승해 이도저도 못하고 갇혀있던 날이었습니다. 내리려면 이십 분이나 남아있어 휴대폰도 못 보니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하고 눈을 굴리던 중 앞사람에 시선이 갔습니다. 정확하게는 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고 있던 “책”에 눈길이 갔습니다.


제목은 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내용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염치를 무릅쓰고 마음속으로 같이 읽어요! 하면서 책 주인만 모르는 몰래 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침 새 챕터가 시작되는 구간이었어요.


어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한 문장은 많은 생각을 불러왔습니다. 분명 어렸을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어린이 중 한 명이었는데 말이죠.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눈은 바삐 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건강한 어른은 자신이 사랑스럽고 가치 있으며 성실하다고 느낀다.


어느 누가 읽어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문장. 잠깐 읽었을 뿐인데 아침부터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 어떻게든 제목을 보려고 애쓰다가 이내 책 주인분이 책을 덮으며 열리는 문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목을 알아내 뿌듯한 표정으로 구독하고 있던 밀리의 서재로 들어가 검색 후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라는 에세이였습니다. 좋은 책을 발견한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지하철을 탈 때마다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는 것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책을 쥐고 있는 손을 발견하면 제목도 알아내려고 눈을 게슴츠레 뜬 적도 있었답니다. 나름 전자책도 구독하고 있는데 영상만 보느라 시간을 보낸 제가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고요. 또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만석의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데, 제 옆에 책을 읽으시는 제 또래 여성분과 뒤에는 중년의 여성분이 서계셨죠. 조용한 지하철엔 적막이 잠시 흐르고 있었는데 툭툭, 중년 여성분이 책을 읽으시는 여성분의 어깨를 살며시 터치했습니다. 저는 왠지 모르게 살짝 긴장을 하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아가씨, 책 읽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생각지도 못한 다정한 말이 나오자 마음속이 몽글몽글 해졌습니다. 말을 건네받은 책 주인은 네? 하시다가 이내 아,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거렸습니다.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 미소 짓고 있지 않으셨을까요. 칭찬 듣기 힘든 좁은 지하철 안에서 따뜻한 말이 피어나자 피곤했던 아침 출근길이 조금 생기가 도는 것만 같았습니다. 주변 사람이었던 저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출근길, 지하철, 책. 이 세 가지 단어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문장을 들은 하루였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