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선생님 시점
스승의 날이면 생각나는 스승님이 몇 분이나 계신가요?
저에겐 몇 분 계십니다만.
유난히 바쁜 5월, 특히나 두 아들의 생일까지 5월에 연이어 있어서인지
뭔가를 하지 않아도 마음은 무엇인가로 가득 차 바빠지고는 합니다.
5월 15일
스승의 날에 꼭 연락을 드리게 되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허보O 선생님(작년에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반백이 넘은 지금도 스승님으로 아련하게 기억되는 참 감사한 분이지요.
띠리리리리리
벨소리가 길게 울리기 전에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셨습니다.
"선생님! 꼭 이런 날만 전화를 드리게 되네요."
"그러니까 더 고맙지요! 이런 날에 잊지 않고 전화해 주는 제자도 있고요."
"건강하시죠? 요즘은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바쁘게 보냅니다. 생업 하고는 관계없이 봉사활동도 하면서..."
선생님은 꼭 존대를 하시고 저 또한 어색함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집니다.
건강하시냐?, 사모님은 안녕하시냐? 등등 안부를 여쭸습니다.
"그래 원장님은 어떻노? 집안에는 별고 없고요? 자녀들도 원만하시고? 연령이 이찌됐노?"
'나 부산 사람이에요!'가 너무 티 나게 묻어나는 구수한 억양으로 가족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꼭 누군가 편 들어주기를 바랐던 아이처럼 선생님께 냉큼 이르고 있는 거 있죠.
"저 때도 그렇게 말을 안 들었나 싶어요. 자기들이 성인인 줄 안다니까요."
"말을 안 들은 기는 아이고... 그 당시, 우리 원장님이 학교 다니던 80년대 하고는 세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아이들이 완전히 다르다 아이가."
"그렇긴 하지요?"
"야! 우리 클 때는 이런 말 해 싸면 뭐라카는 줄 아나? 꼰.대"
"네."
" 그 당시 우리 원장님은 어떤 아이였게요?"
선생님께서 개구지게 물으시는 겁니다.
예상치 않은 물음에 살짝 당황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말끔하게 포장할 수도 없고.
잠깐 그때 나는 어땠나 생각한 그대로를 대답했습니다.
"저도 보통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아이였던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 말씀에 단 번에 "예" 했던 게 몇 번 안 되는 것 같은......
"거기에서 말하는 보통이 아니었다는 말은?"
"음...선생님들이 다루기가 편하지는 않았던 아이였던 것 같아요."
" 음, 뭐라카노? 자기 생각이 뚜렷했고... 또 그 당시 학교 문화로 봤을 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알겠습니다 케야 되는데... " 하시면서 정말 크게 웃으셨습니다.
"와, 원장님이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성실 근면하고, 예의 바르고... 요리요리 써진 아들이 최고 모범생이었다아이가.?
"그랬겠죠!"
"요즘은 생활기록부에 성격이 과묵하고... 이런 표현은 절대 쓰지 말라케요."
요새는 '과묵하다'는 표현은 사교성이 살짝 떨어진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단다.
"......"
그러면서 저는 잠깐 생각했더랬습니다.
근면성,자주성, 협동성, 책임감 등등 나름의 잣대로 학생들의 성품이 '수우미양가'로 점수 매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쯤으로 해두죠.)
그땐 그랬습니다.
협동성이 '다'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왜?"
"와, 우리쌤 장난하시나?"
이랬던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정말 밉상이었겠네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잠깐 돌아가 쿡쿡 웃었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여학생은
선생이라 불리며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푸르디푸른 아이들과 함께 말입니다.
빨강도, 노랑, 자주, 다홍, 팥색, 보라도 모두 피어나면 꽃이니까요.
저와 한 집에 사는 제 아이들과도
저와 한 울타리에 있는 어린이집 아이들과도 더 사랑하며 지내보자 마음먹어봅니다.
통화 말미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조건 예 예 카는 아들이 어른들께는 착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본인들이 행복케야 안겠나?"
"당연히 그렇죠"
선생님께서 기억하는 그 여학생. 당시에는 모범적이지도,착하지도 않았음이 판명되었습니다만.
"우짜든지 행복하게 지냅시다."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가 최고의 현답이었습니다. 또 연락드릴게요!
선생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