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조직의 사용설명서

모든 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by 한그루

모든 게 틀어지기 시작한 건 경영이사를 뽑고 나서였다.

젊은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회의는 점점 길어졌다.

“왜요?”“제가요…?”

그 질문들이 쌓였다.

한라산 조선에서는 우릴 답답해했다.
한 번에 진행되는 게 없다고 했다.

설명해야 할 게너무 많아졌다.

진고동 형님도 마찬가지였다.
형수님을 만나 갑자기 회사를 세운 사람이었다.

경영도 회계도 잘 몰랐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경력이 많은
나이 있는 경영이사를 뽑았다.

순해 보였다.

말도 많지 않았고 고개도 잘 끄덕였다.

우리가 모르는 걸 잘 처리해 줄 것 같았다.

그건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한라산 조선 미팅에서
그 사람은 모든 이야기를 바로 알아들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즉각 대응했다.

그건 분명 능력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순한 얼굴 뒤에 가까이 갈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선을 먼저 긋는 사람.

원칙이 먼저고 사람은 나중인 타입.

원칙주의자였다.

그가 들어온 뒤로 진고동 형님도
나도 점점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를 할 때도 계산이 필요했다.

예전 같으면 넘어갔을 일들이 하나하나 걸렸다.

그즈음부터
앵이와의 관계도 더 어색해졌다.

사무실은 늘 시끄러웠다.

대출 이야기였다. 되니, 안 되니.

사람들은 괜히 큰소리로 말했고
나는 그 소리가 다 나를 향하는 것 같아
귀가 간질거렸다.

이럴 땐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한 번 더 마셨다.

사람들이 나를 본다.
아니, 보는 척을 한다.

나는 알고 있다.
이 회사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

진고동 형님 이야기 그 이름만 나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나는 늘 말한다.
형님과는 하늘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이라고. 과장 같다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사실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관계다.

어디까지 말해도 되고 어디부터 가 위험인지 나는 잘 안다.

술 마시다 농담처럼 묻던 날이 있었다. “무슨 사이냐”라고.

그 질문이 싫었다.

대답하면 선이 생길 것 같았고선을 그으면 지금의 자리가
흔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웃기만 했다.

사람들은 내가 ‘제2의 대표’라고 말하는 걸 허세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좋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 왜 있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으니까.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도 어디선가 들린다. 직접 듣진 않았다. 직접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게 더 편하다. 사고를 치고 다닌다고들 한다.

그래도 정리된다.

늘 누군가가 해준다.

그게 내가 가진 힘이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

면접 날을 기억한다.

노란 머리.
눈에 띄는 옷.

긴장하면 사람이 밝아진다더니
딱 그랬다.

“스트레스는 뭐로 풀어요?”

그 질문이
면접 질문이었는지 그냥 던진 말이었는지나도 잘 모르겠다.

웃음이 길어졌다. 시간도 길어졌다.

그런 분위기가 나는 싫지 않았다.

며칠 뒤
채용 연락을 했다. 경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기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출근을 같이 했다. 집이 가깝다는 이유였다.

카풀은 편했다. 너무 편해서

회사 사람들이 보기 시작했다.

말은 안 했지만 눈은 정확했다.

한 쌍처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부정도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게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선에서 앵이는 더 이상 선을 넘지 않았다.

회사의 모든 남직원들과 거리낌 없이 지내는 모습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땐 애써 무시했다.

어느 순간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함께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그런 사람을 만났고 그래서 말했다.

“이제 카풀은 못 해.”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설명이 되고
설명은 책임이 되니까.

그날 이후버스를 탔다고 들었다.

지각이 잦아졌다는 말도 귀에 들어왔다.

누군가 물었다.

“왜 카풀 안 해요?”

나는 모른 척했다. 모르는 척이 가장 안전했다.

아침에 같이 커피를 마시던 날들. 웃음. 농담. 법인카드. 그 모든 게

아무 일도 아닌 게 되도록 만들었다.

사표를 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진 않았다.

붙잡지 않았다.
이유도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내가
대답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날 사무실에서는 여전히
대출 이야기가 돌았다.

“알아서 되겠지.”

그 말이 편했다.

그 말속에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누군가를 자른 것도 버린 것도 아니다.

그저 불편해진 걸 정리했을 뿐이다.

자동차의 히터를 끈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아무도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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