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사람의 목적과 가르치는 사람의 목적은 다르다.
공부를 잘했다는 사람은 왜 멍청해 보일까?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다는 사람은 대체로 생존을 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공부밖에 몰라 생활력이 떨어진다.'라는 말을 당연하게 여긴다. 예로부터 '백면서생', '문약하다' 등의 말을 써 왔듯이 역사가 깊다. 하지만 서구의 경우는 덜 한 것 같다. 이것은 서구와 우리가 가르치는 학문이 생존 기술의 거리가 멀고 가깝고의 차이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참고할 좋은 다큐멘터리가 있다.
성적이 실력을 반영할 것이라는 착각을 일깨워준다. 평가자에 비위를 맞추는 능력, 즉 '수용적 태도'로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고, 진정 그 내용에 심취해 '비판적 태도'로까지 깊이 이해하고 파고드는 학생은 저조한 성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나라 대학의 이야기이고 미국의 대학에서는 반대의 결과를 보였다는 것이 이 다큐의 핵심 내용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심리학 개론> 시간에 나는 학습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강의 내용을 뛰어넘는 질문을 자주 했다. 내가 얼마 전에 작성한 <사랑의 삼각형과 수의 개념>의 글도 이 심리학 개론 시간에 배운 것을 일부 담았다. 그만큼 강의를 체화시킬 만큼 잘 이해했다. 하지만 평점은 매우 낮았다. 시험문제가 중학교 쪽지시험 수준으로 너무 유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강의 내용을 본질적(intrinsically)으로 이해하려고 했고, 시험 성적은 겉으로(extrinsically) 표현된 것을 암기한 만큼 점수를 줬다. 낮은 점수를 받은 나는 그 강의의 내용을 연애할 때도 쓰고 내 삶, 내 생존에 도움이 되게 사용할 만큼 되지만, 높은 평점을 받은 사람은 아마 자기가 수강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할 것이다. 성적을 매기는 교수의 입장도 있다. 학생들이 교수의 주관이 개입되는 시험을 싫어해서 그렇다는 것. 중고등학교 교육에서부터 이미 익숙한 평가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 등.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바꿔보자. '왜 배우는가'라는 배움의 목적이 아니라 '왜 가르치는가?' 교육의 목적으로. 영화 <올드보이>에서 유지태가 최민식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질문이 잘못됐으니 답이 나올 수가 없지. '왜 가뒀을까?'가 아니라 '왜 지금 풀어줬을까?'라고 물었어야지!
신해철이 서태지와 자신을 비교하며 했던 말이다. 이 둘은 6촌 사이다. 서태지는 중학교 중퇴,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서 낙오자다. 반면 신해철은 정규 교육 과정을 모범적으로 거친 명문대 출신이다.
그는 거침없는 낙오자다. 그래서 당당하다. 승리를 거둘 자격이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고뇌하는 비겁자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이길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작지만 그의 시대에서 나의 영토가 조금은 있다.
나 같은 놈이 많으니까.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과 가수 신해철과의 인터뷰 중에서
지금도 연예인과 소속사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승기와 츄를 착취한 기획사가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서태지가 나오기 전까지 분쟁조차 없었다. 조폭에 의해 운영되는 기획사가 연예인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가왕이라고 하는 조용필뿐만 아니라 전영록, 이용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도 조폭이 하사해 주듯 던져주는 푼돈으로 생활했다. 이런 엉터리 음악산업 구조에서 뮤지션을 독립시킨 혁명가가 서태지다.
교육을 받지 않은 자의 당당함 vs 교육을 받은 자의 비겁함
우리나라 교육은 비겁자를 기른다. 나의 사고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배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피는 능력을 기른다. 눈치 빠른 하수인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자신의 생각과 성적 평가자의 생각이 다르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평가자의 의도에 맞춰라."가 좋은 성적을 받는 방법이다. <참고 : 다큐프라임 - 시험 4부 : 서울대 A+의 비밀>
다음은 내가 중2 때 마주한 문제다.
중학교 기술 교과 해양 단원에서 출제된 문제
나는 교과서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출제자인 교사가 3번을 답으로 하려고 낸 문제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교사의 비위를 맞춰줄 이유가 없었던 나는 3, 4번이라고 적었다가 마지막 순간에 4번만 적어서 제출했다. 그래야 교사랑 싸울 맛이 더 날 것 같아서다. 3, 4번을 답으로 인정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4번만 쓴 것을 답으로 인정하려면 교사의 자존심이 상할 것이기에. 당시 나는 중2 사춘기였다.
정답은 역시나 3번으로 발표되었고, 나는 따져 묻기 위해 교무실로 출제자를 찾아갔다. 아줌마 교사였던 그분은 그때 다른 교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시험지를 보이며 질문을 하자, 나를 힐끗 보더니, 무시하고 손짓으로 나가라고 했다. 상대도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본 무시였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구나'. 처음으로 당해봤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교무실 문을 '꽝'하고 세게 닫고 나왔나 본데, 그다음 날 아침에 그 교사가 나를 교내 기술실로 불렀다. 주변 교사들에게 내가 전교 1등을 번갈아 할 정도의 학생이니 귀담아들어보라는 말을 들었는지 나름 논리를 폈다.
"네가 교과서를 정확히 외웠다면 500m 이외의 답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도 지지 않고 답했다.
"교과서의 내용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1,000m가 답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논리로 안 되겠다 싶었던 그 교사는 내가 교무실 문을 세게 닫고 나갔기 때문에 싸가지가 없어서 정답 처리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시험은 학생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학생 때는 시험 성적에 지배되고 직장인이 되면 돈에 지배된다.
이렇게 지배를 받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비겁자로 길러지는 것이다. 반면에 이 교육 시스템을 벗어난 사람은 당당함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나라도 이럴까? 정도의 차이가 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처럼 적당한 시기에 스스로 낙오를 한 사람이 큰 성공을 거둔 예가 있지만, 교육과정을 충실히 거쳤다고 해서 비겁자가 되는 예는 한, 중, 일, 인도 등 국민 개개인의 주권의식이 낮은 나라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배움의 목적'과 국가가 국민을 '가르치는 목적'이 달라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