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애에서 가장 흥미롭지 않은 때를 소재로 한 예능, 그러나 의외의 재미와 특별한 교훈을 발견.
남녀가 처음 만나 설레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는 갈등하고, 그러다 결혼해서 잘 지내거나 이혼하거나. 이런 것을 소재로 한 것은 소설, 시, 영화, 드라마, 노래 가사 등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부부생활 중 딱히 불화와 갈등이 없으면서도 섹스리스로 지내고 있는 커플을 이야기 소재로 한 것은 드물다. 신문, 잡지의 기사라면 몰라도. 이혼으로 가는 전조 현상 정도의 사안을 가지고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을 만든 실험정신이 훌륭하다. 흥행은 몰라도 프로그램은 매우 성공적이라 보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출연한 네 쌍의 부부들이 그들의 인생 스토리를 프로그램에 갈아 넣어서다. 하지만 그들도 출연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하니, 제작진, 출연진, 그리고 시청자까지 모두 윈-윈-윈.
프로그램 홈에 있는 기획의도
당장은 쉬운 선택이 나중에 큰 고통과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
<쉬는 부부>에 출연한 네 쌍은 왜 '이혼'이나 '현 상태 유지'라는 쉽고 편한(?) 선택 대신, 관계 개선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 관계가 없어진 부부가 다시 관계를 가지는 부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건물도, 물건도 고쳐 쓰는 것보다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쉽고 비용이 적게 들 때가 흔하다. 사람의 관계도 그렇다.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고쳐보려 하면, 그 문제를 같이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어려움이 생기고,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겨서 오히려 더 큰 갈등으로 치닫는 것이 드물지 않다. 그래서 문제를 덮어두거나, 참거나, 포기한다. 그것이 더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옳은 방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지만, 여기에 참여한 네 쌍의 부부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관계를 개선해 다시 사랑을 나누는 부부가 되는 것이 옳은 길이라 여겨서다. 그래서, 프로그램 내내 '이혼'이나 '헤어짐'을 언급하지 않는다. 상대를 비난하거나 화를 내는 것도 자제한다. 여기에 제작진은 전문가의 도움과 노력을 적절히 제공했다. 100일의 시간과 두 번의 워크숍, 부부진단 검진표와 전문 상담 등의 치유와 회복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이들의 이런 진지한 노력에 걸맞은 결실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한 사람을 오래 사귀는 것 vs 많은 사람을 사귀는 것
영화 <돈 룩 업>에서, 화려한 삶을 사는 여자 쇼 MC 브리(케이트 블란쳇 배우)는 수수한 삶을 사는 천문학자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배우)와 잠자리를 한 후 침대에서 자신과 연애 경험을 이야기한다. 두 번의 이혼, 그리고, 전직 대통령 두 명, 장관, 그리고 스포츠 선수 등과 잤다며 자랑하듯 이야기한다. 하지만 민디는 현재의 아내와 쭉 살아온 것 밖에 연애 경험이 없어, 어릴 적 기르던 개가 죽어서 슬펐었다는 이야기 등으로 얼버무린다.
영화 <돈 룩 업>에서 브리(케이트 블란쳇)과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러브 신
많은 사람을 사귄다는 것이 연애를 잘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만이 새로운 연애가 아니다. 한 사람을 오래 사귀면서 그 사람이 변하고 성숙해 가는 것을 보는 것도 충분히 새로운 연애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사귀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연애 상대를 자주 바꾸는 사람이 닫을 수 없는 곳이다. 짧은 교재만 반복하면 상대의 얕은 단면밖에 보지 못할 수 있다. 뻔한 플러팅(flirting)을 반복하는 것이 싫증 날 수도 있다. <돈 룩 업>의 민디 역할과 반대로 현실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연인을 자주 바꾸는 것으로 유명하다. 25세 이하 여자만 사귄다는 '25세 연애 법칙' (최근 27세 모델을 사귄다 하여 이 법칙이 깨졌다고 함)
레오의 25세 연애 법칙을 보여주는 그래프/reddit
여행에 비유하면, 한 나라,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그곳의 주민인 듯 지내며 여행하는 것과 여러 나라의 유명 도시를 잠깐씩 머무는 여행과 비교된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짧게 여러 곳을 돌아보는 여행자가 할 수 없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도 여행 초창기에는 여러 곳을 가보는 것에 의미를 뒀다. 하지만 지금은 한 곳에서 오래 머물기를 선호한다. 오래 머물러야 할 수 있는 일, 매주 하루 모임을 갖는 그 지역 커뮤니티에 참여해서, 다음 주 모임에서 내가 할 역할을 배당받는 일. 현지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과 여러 번 다른 경험을 하는 것 등. 현지인 입장에서도 여행자에게는 주지 않을 기회를 오래 머물 사람에게는 주는 것이 많다. 다시 <돈 룩 업>에서 지구 종말의 날, 여러 남자들과 화려한 관계를 가졌던 브리는 쓸쓸한 종말을, 한 여자와 오래 산 민디는 가족과 친구,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며 외롭지 않은 종말을 맞이한다.
영화 <돈 룩 업>에서 지구 종말을 맞이하기 직전 신
다른 연애 리얼리티 쇼에서는 볼 수 없는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
프로그램 내내 리얼리티가 부족한 어색함은 없었다. 저래도 될까 싶은 것을 요구할 때, 특히 상대의 부부관계 검진표를 보게 한다거나, 남자, 여자 출연자들끼리 각각 나눈 내밀한 이야기를 상대 출연자들에게 보여줄 때 제작진의 과욕으로 출연자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가 싶은 불편함은 있었지만, 부자연스러움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네 쌍 부부의 인생과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을 깊이 있게 알아갈 수 있었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봤던 출연자 '구미호'
특히 흥미로운 출연자는 귀화한 러시아계 한국인 구미호(한국명이 '고미호'라서 이렇게 지은 듯)다. 그녀 자신도 귀화를 위해 한국의 역사, 언어 등을 공부했지만 한국의 부부 생활은 전혀 몰랐었는데 이 프로그램 출연으로 그것을 채울 수 있어서 보람 있다고 했다. 한국 생활이 10년이라는데 언어능력은 토종 한국인 못지않다. 나도 긴가민가 확신하기 어려운 의미를 확신을 가지고 대화를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 부러울 정도였다. 특히 남편과의 대화할 때는 한국인 남편보다 더 높은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재미있는 포인트.
결혼은, 사랑을 통해 자아실현을 위해 할까? 아니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할까? 사람마다 이 두 요소가 어떤 비율을 이루고 있겠지만, 우리나라가 지나치게 생존 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구미호 출연자 덕분에 알았다.
러시아 남자는, 가진 돈이 한 끼를 때울 빵을 사거나 꽃 한 송이를 살 만큼밖에 없다면 꽃을 택한다.
출처 불명, 어떤 라디오 DJ의 멘트
아주 옛날 무심코 흘려듣고 있던 라디오에서 어떤 DJ가 이런 멘트를 했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랑 참 다르게 산다고 생각하며 흘려 들었는데, 구미호 출연자의 이야기를 듣고 이 멘트가 떠올랐다.
"러시아 친구들이랑 각자 부부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거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해. '너는 얼마나 그를 사랑해? 그는 너를 얼마나 사랑해 줘?' 같은 질문을 하지, 남편의 돈벌이나 경제 상황 같은 것은 안 궁금해해."
바람직한 부부상은?
바람직한 남편상, 아내상 이야기는 흔히 들어봤어도, 바람직한 부부상에 대한 이야기는 드물다. 주변에 롤 모델 삼을 만한 부부도 없다. 부부가 사이좋아 보인다고 칭찬하면 손사래를 친다. 알고 보면 아니라고.
'배려'라는 말이 고맙게 느껴지기는 커녕, 자기 합리화와 변명으로만 들린다.
특히 우리나라는 고도 발전을 너무나 빨리해서 몇 년 만 나이 차이나도 전혀 다른 경험을 하며 성장했다. 그래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성실하고 바람직하게 살아온 사람도 좋은 부부상을 만들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 프로그램에서도 '배려한다'라는 말이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상대를 답답하게 하는 말로 자주 쓰였다.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부부로서 함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고민이 적어서다.
웃어른으로부터 본받을 만한 부부를 보지 못했으니 결혼이 두렵고 아이를 갖는 것도 꺼려지는 것이 우리나라 출생률이 특별히 낮은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섹스리스 소재를 소설에서 다루면 현실감이 떨어지고, 다큐로 다루면 너무 진지해고, 영화로 다루면 볼 것도 흥미로울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리얼리티 쇼로 다룬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사랑을 찾고 만드는 과정을 그리는 리얼리티 쇼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이 있는 부부간에서만 나눌 수 있는 솔직한 대화가 많이 오간 것이 좋았다. 배울 것이 많은 프로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