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새옹지마 인생관과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이 콘크리트처럼 배합된 영화
한 줄 평
동양의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관과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이 콘크리트처럼 잘 배합된 영화
고사 성어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공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새옹지마라고 한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좋다, 나쁘다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반면 서양은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직선론적 세계관을 가졌기에 새옹지마에 해당하는 격언을 찾기 어렵다. Good or bad, it's hard to say 정도가 어떨까 싶다.
새옹지마, Good or bad, it's hard to say.
대지진의 재난 상황에서 당장의 안전을 확보한 아파트에 남은 생존자들, 지금 당장은 행운이지만 나중에 다가올 불행의 원인이 된다. 아파트가 무너지기 전, 드림팰리스 주민은 황궁아파트 주민들을 깔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바퀴벌레' 소리를 들으며 구걸하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새옹지마의 가르침. 이것은 사람의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장은 롷다고, 또는 그르다고 생각되는 행위가 나중에 그 반대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생각이 필요한 재난의 상황, 사람들은 생각 없이 살 방법을 추구한다.
기존의 질서와 관념이 무너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생존 규칙을 세워야 하는 순간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구심점이 될 대표자를 뽑아서 시스템을 만들어 앞으로의 일을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영화 중 주민 회의에서 민성(박서준 배우)의 말
당장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은 뇌에게 큰 부담이다. 익숙한 체계에 들어가 최소한의 생각으로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자신의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의 부담을 공동체에 떠넘기고 싶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 상황에서는 감각을 통한 본능이 앞선다. 이성적 사고와 판단은 생존을 확보한 이후의 일이다. 여기서 생사를 걸고 최전방에 나가있는 사람과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말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뉜다. 부녀회장 금애(김선영 배우),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간호사(박보영 배우), 그리고 첫 번째 외부인과 충돌에서 다리를 크게 다친 박 소장과 질환이 있어 군 면제를 받았다는 도균이 치열한 전장 뒤에 있는 사람들이다.
세 명의 주연과 세 명의 조연은 성경의 삼위일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듯하다. "저는 이 아파트가 선택받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대사와, 지팡이로 주민을 이끄는 모습 등도 그렇다. 이름도 모세범. 자기 이름을 적을 때 무의식 적으로 'ㅁ'을 먼저 적었다가, 아차하고 'ㅁ' 위에 '기'를 붙여서 '김'자를 쓰고 나머지 '영탁'을 쓰는 장면에서 연출의 섬세함이 보인다.
외부자 모세범이면서 내부 주민 김영탁 행세를 하는 이병헌은 '모순'을 상징한다. 명화(박보영 배우)는 비현실적인 이상을 추구한다. 그 사이에 있는 민성(박서준 배우)은 양쪽을 오가며 현실을 지탱해 나간다. 현실적인 악행을 직, 간접적으로, 혹은 소극적, 적극적으로 행하면서 현재를 모면해 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샤넬 머리핀을 주어서 명화에게 껴보라며 주는 장면은 애처롭다.
부녀회장 금애(김선영 배우)는 부조리한 현실을 잘 알고 실천한다. 귤을 한 개 더 줌으로써 김영탁을 주민대표가 되도록 움직이고, 배급의 차등을 합리화하는 것이 부조리와 조리를 잘 넘나 든다. 혜원(박지후 배우)도 민성처럼 현실적인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혼란스럽다. "바깥은 지옥인데, 여기 계신 분들은 너무 낙관적이신 것 같아요."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다. 도균(김도윤 배우)은 명화와 같은 이상주의자다. 현실이 어떻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며 살지 못할 것 같으면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세 주연과 세 조연은 연결된다.
원작이라고 하는 <유쾌한 왕따>와 제목을 차용했다는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박해천 저)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의 내용은 원작과 많이 다르게 창작된 것 같다.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에 맞게 많은 군상을 보여주기보단 세 갈래의 유형으로 나누어 관람객이 각자 조금씩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장치한 것 같다. 특별히 어느 유형을 나쁘게만 그리지도 좋게만 그리지도 않았다. 김영탁을 죽인 모세범은 김영탁의 노모의 대소변 수발을 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처와 딸을 챙기려는 가장의 모습도 보여준다. 부녀회장도 자기 자식에게는 여느 어머니와 다를 것이 없는 모성을 보인다. 명화도 마찬가지다. 외부인 배척하지 말자고 하더니, 주민대표를 몰아내려고 할 때는 그가 외부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요할 때는 지독히 현실적으로 된다.
'이병헌 효과' 때문인지, 배우들 모두 연기의 완성도가 높다. 조금만 연기를 못해도 두고두고 욕먹을 것 같아 애를 많이 쓴 것 같다. 감독도 박찬욱에게 연출을 배운 것이 누가 되지 않게 애를 많이 쓴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다만 아쉬운 것은 결말이 설명이 부족한 채 후다닥 흘러가버린 것. 내부자 주민이 외부인들과 동조해 황궁아파트 주민을 몰아냈다는 이야기 같은데, 편집할 때 상영시간에 맞추느라 잘라낸 것 같은데, OTT로 나올 때는 좀 더 채워서 감독판도 나오면 어떻까 싶다. 좋은 소재라 시리즈물로 제작돼도 좋을 것 같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아파트> 1982년 윤수일, 영화 엔딩 크레디트 때 혜원 역의 박지후가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