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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ver young Oct 30. 2023

사기 피해자가 사기꾼을 돕는 이유

여행 가이드의 사기행각을 알렸다가, 오히려 일행에게 욕먹은 일

내가 사기당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사기꾼에 동조하는 것보다 더 힘겨울 수 있다.

속인 놈(사람)이나 속은 사람이나


조금만 주의 깊게 살피면 쉽게 알 수 있는 터머니 없는 거짓말에 속는 경우가 있다. 더 나아가 속고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을 오히려 공격하기까지 한다. 다 지나 보면 공범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행동이다. 그렇다고 '속인 사람도 똑같아'라는 식으로 쉽게 판단하면 안 된다. 사기는 피해자의 정신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이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 나름의 방어기제로 이해해야 한다.


신참으로 포상 해외여행을 갔던 일


예전에 재수 종합학원에서 수학 강사를 할 때 일이다. 강사 수가 100명 정도의 큰 학원이라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 난 운이 좋아 1년 남짓한 경력으로 재종반 강사가 되었다. 재수종합학원의 1년은, 모든 대학의 입시 결과가 나오는 2월 중에 시작해서 수능이 끝나고, 수학 논술 시험까지 끝나는 11월 중하순에 끝난다. 그때 학원에서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해외여행을 보내준다. 4박 5일 정도로 여행지 몇 곳을 정해놓고 알아서 고를 수 있었다. 나는 경력도 없고 나이도 가장 어린 편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곳(당시 태국 푸껫)을 택했다. 일행은 30명 정도, 연령 대는 60대 ~ 30대 초반까지, 여자 선생님이 5~6분 있었다.


사기꾼의 첫인상


학원에서 포상 여행을 위해 여행사와 계약하면, 여행사가 태국에 있는 하청 여행사를 통해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 가이드를 배정되는 방식이었다. 여행 경비는 학원에서 모두 지불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사소한 비용과 귀국 인사 선물 구입비용 등으로 1인당 20만 원을 걷었다. 당시 선생님들 수입에 비하면 작인 비용이라 이 비용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숙소는 한 리조트에 일정 내내 머물렀고,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거리의 관광지를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다녀오곤 했다. 가이드는 태국과 한국을 오가며 의류 도매상을 하다가, 지금은 아내와 자녀까지 모두 푸껫에 건너와 살면서 여행사를 운영 중이라 했다. 장사를 하던 사람답게 손님 대접 잘하고 유쾌한 사람이라 일행 모두 신뢰하고 좋아라 했다.


사기꾼의 본색이 드러나다


사건은 일정을 하루 남겨두고 일어났다. 아님 8시에 피피섬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전날 과음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고, 휴양을 목적으로 푸껫을 택한 것이라 따라가지 않고 리조트에 남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시간도 다소 이른데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날 조식을 먹는 사람도 별로 없어, 나와 가이드는 같이 식사하고 7시 50분까지 커피 마시며 이야기하다 출발 준비를 위해 내 방으로 갔다. 대충 챙겨서 내려와 버스에 탑승했을 때가 7시 59분 정도. 이때부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혼란의 시작


버스 안에는 여자 선생님들 전원을 포함해 대충 10여 명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거의 정시에 도착한 나부터 지각이냐 아니냐 논쟁을 하다니,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이상 더 있다가 출발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왜 이럴까 싶었다. 버스에 걸린 시계와 휴대폰 시계 등 기준이 다양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문제는 질책의 정도였다. 1분 지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된 것처럼 반응하는 것. 무슨 영문인지 파악해 보니, 가이드가 8시 정각에 정확히 출발하지 않으면 피피섬에 가는 보트를 탈 수 없게 되어 오늘 일정을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 여기서부터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정시 출발이 중요한데 출발 바로 직전까지 나와 여유 있게 대화할 때는 왜 말을 안 했지?'


가이드의 호들갑은 점점 심해졌다. 정시 출발을 못해 미리 예약한 것은 완전히 무효과 됐지만, 자기가 어떻게 해서든 다른 보트를 섭외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 하려면 예약된 인원 중 한 명의 열외 없이 모두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 일행의 대표는 숙취로 인사불성이고, 허리를 다쳐 복대를 하고 있는 노인 선생님도 있었고, 숙소에만 있겠다는 호텔방 죽돌이도 있었다. '왜 이들 모두를 태워야 한다고 안달이지?'


가이드가 동분 서주하며 모든 일행을 버스에 앉히고 나니 8시 20분이 넘었다. 학원 선생님들은 조직적으로 업무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이나 체계가 없다. 기껏해야 술이 덜 깬 대표자와 총무 역할을 하는 여자 선생님 두 명, 그러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싶어도 가이드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가이드는 태국인 운전사와 의논을 하면서 가끔 큰 소리로 전화를 하고 우리에게 현재 진행 상황을 알려줬다. 자신이 오늘 일정을 새로 잡으면서 비용이 150만 원 정도 추가로 들어가게 됐단다. 이것을 우리가 비상금이라고 가지고 있던 돈에서 지불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모두 그러라고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지금껏 가이드에게 출발 시간을 어겼다고 책망을 받고 있었기에, 시간을 지킨 사람들이 지각한 사람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주고 있었기에 항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만 조심스럽게, "취소된 일정에서 일부라도 환불받는 것은 없나?"라고 물었는데, 전혀 없단다. 이때부터 나는 가이드가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설마에서 확신으로


나도 몇 시간 전까지 가이드를 좋은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그가 사기꾼이라 단정하는 것은 어려웠다. 세계관이 무너지는 느낌.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을 때 가이드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며칠 동안 신뢰가 쌓인 것도 있고, 선생님이라는 체면에 시간 약속을 어겼다는 명백한 잘못이 있고, 비상금은 개인적으로 큰 금액이 아니라서였을 것이다. 가장 친한 선생에게 슬쩍 좀 이상하지 않냐고 물어도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나는 일행 중 가장 신참이라 어찌할 수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만들기


버스로 이동 중 휴게소 같은 곳에 들렀는데, 내 맞은편에 맏언니급 여자선생님, 총무 맡은 분, 대표 맡은 분이 나란히 앉았다. 대표 맡은 분은 아직 술이 덜 깨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고, 맏언니 선생님은 대표를 계속 책망했다. 시간 약속을 안 지켜 공금을 날려먹게 생겼다면서. 조금 듣다가 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서로 책망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여기 와서 매일 밤늦게까지 음주하며 놀고 늦게 일어났다. 특히 대표라 더 오래 있은 것을 탓할 수 없다고 본다. 오늘 일은 평소와 같이 정시보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그때까지 온 사람만으로 일정을 소화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이런 상황으로 몰고 가는 가이드의 태도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면서 근거를 몇 가지 들었는데, 내 말이 그럭저럭 먹혔다. 그래서 결론으로 대표의 컨디션이 나쁘니 내가 적당한 기회에 가이드에게 말을 해 보라는 것. 신참이고 이런 여행도 처음이라 언제 어떻게 할지는 모른 체 그렇게 대화는 끝났다. 그 후 피피섬에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이른바 스콜이라 하는 소나기가 내려서 지붕이 있는 좁은 식당에 비를 피하려 일행이 모였다. 사람들이 모이자 가이드가 또 '가스라이팅'을 시작했다. '아침에 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일행에게 계속 죄책감을 심어주려는 심리전이다. 그래서 내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참고로, 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가이드님, 우리가 이 여행을 하는 목적은 친목입니다. 지각한 사람들을 계속 탓하게 만드는 것은 여행 목적에 맞지 않아요. 그런 말은 삼가 주세요."


라는 취지의 말이었다. 휴게소에서 위임받은(?) 것 때문에 평소에 나답지 않게 나서서 발언했다. 그러다 보니 긴장해서 다소 공격적으로 말이 나갔다. 분위기가 좀 싸~해 졌는데, 가이드가 발끈해서 나에게 화를 냈다. 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망친 오늘 일정을 살리느라 고생한 나에게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뜻하지 않게 가이드와 나 사이에 대립 전선이 흘렀다. (바깥에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거세지고...) 이때, 내 뒤통수를 때로는 호통 소리가 들렸다.


뒤통수가 얼얼, "네가 뭔데?"

"네가 대표도 아닌데 왜 나서! 이 학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됐다고 나서냐!"


원로급 선생님들 몇 분이 가이드를 두둔하고 나섰다. 이것은 우리 일행 구성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나설 일이 아닌 것은 맞는데, 난 몇 시간 전에 대표에게 위임을 받았다는 생각에 튀어 나선 것이고, 대표 입장에서는 이렇게 튀는 방식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두둔해 주지 않았다. 결론은 내가 찌그러진 것.


모든 일정이 끝나고, 마지막 날 밤, 숙소의 한 방에 일행 모두가 모였다. 화합도 하고, 의견 나눌 것은 나누는 시간. 피피섬 일정 이후 내가 찌그러져 있고 가이드는 원로급 선생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비상금은 가이드 수중으로 모두 들어갔다. 약 250만 원 정도. 피피섬은 보트 예약이었고, 그 이후에 특별 공연 관람과 식사 등으로 지출한 것을 비상금으로 지출하게 만들었고, 공식적(?)으로는 가이드가 우리에게 선심을 쓴 것이 더 많은데 우리는 모든 비상금을 가이드에게 주고 감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나의 뒤통수를 치면서 호통친 선생들과 몇몇은 돈을 좀 더 걷어서 가이드에게 보답해 주자는 주장을 했다. 나는 입 닫고 있었지만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충 마무리됐다. 어쨌건 내가 그 후 나선 일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귀국 후 대표가 절차를 거처 그 가이드에게 부당하게 지불된 금액을 받아냈다. 1인당 9만 원이 넘었으니, 가이드는 사기 친 금액의 전액 이상을 토해낸 것이다. 가이드에 비해 학원이 갑 오브 갑이니까.


환급된 금액으로, 가이드는 사기꾼이었다는 것이 증명됐다. 하지만 그때 나를 공격하고 가이드를 옹호했던 사람 중에 나에게 사과한 사람은 없다. 그들에겐 난 여전히 배은망덕하고 건방진 사람이고 가이드가 선량한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나도 가이드를 좋게 보다가 사기꾼으로 보게 되는 것이 괴로웠다. 단순히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세계관을 바꿔야 하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생각을 바꾸는 쉬운 것이 아니고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차라리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편했을 것 같다. 내가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계속 속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거짓을 인정하는 것보다 거짓을 강화하는 것이 편하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탓하는 것보다,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택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오류를 인정하는 진실 보다, 나의 거짓을 밝히는 진실된 사람을 공격해서 주저앉히는 것을 택하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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