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내가 남아있는 공간에서
현재의 나를 본다.
때로는 같은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참 묘해진다. 같은 공간이면서도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이 든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많이 다르다. 지금보다 많이 슬펐던 과거와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된 현재는 마주 보고 있지만 너무 멀어 닿을 수 없는 이란성쌍둥이 같기도 하다.
작게 웅크리고 앉아 슬픔을 꾸역꾸역 참아내야 했던 나는 어두운 밤 모퉁이 어딘가에서 밤을 새우곤 했다.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했던 나는 밤이 되면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하루 내내 눌러둔 슬픔을 꺼내서 자유를 주곤 했다. 슬픔은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듯이 마음껏 집안을 돌아다니며 나를 밤새 잘 수 없도록 꽤나 시끄럽게 굴었다.
어쩌면 숨쉬기 위해 책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내 슬픔은 해가 뜬 모든 시간엔 가면 속에 숨어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밤.......
하루 종일 눌러서 숨겨야 했던 슬픔은 하루 종일 나를 눌러댔고 벗어날 수 없었던 나는 살아 숨쉬기 위해 책을 읽었다. 책을 좋아하지도 않고 잘 읽지도 못했던 나이지만 그 순간에도 살길은 그것뿐이라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이었던 것 같다.
한 장 한 장 읽어가다 보면 어느샌가 슬픔이 나를 누르지 않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나에게.....' 미안해... 미안해...'라고 작게 소곤거리는 기분이었다.
한동안은 살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 순간이 유일한 해방인 것처럼 느껴져서 구원처럼 매달린 것 같다. 그렇게 흐르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어두운 밤 모퉁이에서 웅크리지 않는 시간이 늘어갔고 밤을 새우지 않는 시간이 늘어갔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자리를 본다. 그 자리에서 나는 밤이 되면 눌러둔 가면을 벗고 밤을 새워 슬픔이 하는 모든 행위를 지켜보곤 했다. 같은 공간 같은 자리에서 밤이 되면 자유를 되찾던 슬픔은 이제 가끔 인사하러 오는 정도로 뜸해졌다. 잊고 있다가 느닷없이 찾아온 슬픔에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지만 슬픔이 왔다가 실컷 인사하고 다시 돌아갈 거란 걸 안다.
' 그래... 네가 있었지...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딱히 그건 아니었나 보네....'
나는 이제 그 자리에서 미래의 나를 그린다. 같은 공간 같은 자리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내가 함께 있다. 가끔 찾아와 인사하는 슬픔은 말없이 안아서 달래주려 한다.
그리고 그 슬픔에게 얘기해 준다.
믿어지니? 너와 내가 함께 했던 시간들 말이야.
너무 슬퍼하지 마. 나를 봐.
나 웃는 거 좀 자연스러워지지 않았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지우지는 말자.
나에겐 그 시간도 소중했어. 슬프니? 잊히는 게?
그러면 그냥 가끔 찾아와. 너를 위해 내 품을 내줄게...
너를 위한 공간은 여전히 비워둘게.
너를 위해 울어줄게.
난 이제 네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
나 좀 멋진 거 같지 않아?
있잖아.... 나 이제 보이는 게 있어..
너도 보여?
같은 공간 같은 자리에 우리 둘 말고... 더 있어.
너무 환하게 웃고 있거든... 눈물이 날 만큼...
너도 보여?
그러니 이제 내게 너무 미안해하지 마...
네가 없었다면 나도 없고...
지금 보이는 그녀도 없으니까...
그리고 난 너도 잊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