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들링

「허들링 」 02

by 황윤정

줄리아는 나의 영어 이름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여덟 살 때 도선주 여사가 나에게 물려준 이름이었고 그것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의 내가 도선주 여사로부터 빼앗은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의 도선주 여사로 말할 것 같으면 고등학교도 미처 졸업하지 못한 열아홉 풋내기였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어렸었구나 싶지만 여덟 살이었던 나의 시선으로 봤을 땐 엄청난 어른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선주 여사는 자신이 고작 열두 살일 때 내가 태어나서 그 어린 나이에 이모가 되어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엄마가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자 그때부터 엄마를 대신해 나의 뒤치다꺼리까지 해 주었다. 할머니도 같이 살았으나 할머니는 식당 일로 하루 종일 바빴기에 나를 돌보는 일은 오롯이 도선주 여사의 몫으로 돌아갔다. 내게 분유를 먹이거나, 나를 어르고 달래 재우거나, 심지어 냄새나는 똥 기저귀도 군말 없이 갈아 주었으며, 나중에는 유치원에도 매일 데려다주고 데리러 왔다. 당연히 나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온 사람도 엄마가 아닌 도선주 여사였다. 그때쯤 엄마는 이미 아빠처럼 연락이 끊긴 상황이었다. 교복을 입고 내 옆에 선 도선주 여사를 보며 사람들은 언니가 동생도 잘 챙기고 참 착하네, 말했고 나는 옆에서 눈치 없이 이모예요, 이모! 외치며 도선주 여사의 다리에 매달렸었다.


그렇게 도선주 여사가 돌봐 주고 챙겨 준 덕분에 별 탈 없이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얌전히 지내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몇 주 만에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하굣길에 학교 앞 문구점에서 세일러문 크레파스 세트를 훔치다 주인아저씨에게 그만 들켜버린 것이었다. 처음부터 크레파스에 손을 댈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사탕이나 하나 사려고 들어갔는데, 평소에는 불량식품을 고르거나 준비물을 사는 애들로 북적거리던 그곳이 그날따라 텅 비어 있었고 주인아저씨도 웬일로 안경을 벗어 둔 채 졸고 있었다. 마치 문구점이라는 공간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나른하고 고요했다. 햇빛이 비치는 곳마다 먼지가 흩날리는 것을 빼면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운동화를 끌지 않고 사뿐거리며 문구점을 한 바퀴, 또 한 바퀴, 총 두 바퀴를 돌았다. 여전히 주인아저씨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 기회야! 라든가, 오늘 기필코 훔치겠어! 라든가, 그런 다짐을 한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냥 무언가에 홀린 듯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크레파스 앞에 멈춰 서 바닥에 책가방을 내려놓았고, 찌익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지퍼를 열었으며, 그 안에 크레파스를 넣었다. 그런 다음 역시나 느린 속도로 지퍼를 잠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과정을 끝내고 허리를 펴는 순간 주인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고 싸늘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어른의 눈에 온몸이 얼어붙어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주인아저씨의 다그침에 훌쩍거리며 도선주 여사가 다니던 고등학교 이름만 더듬더듬 반복했다. 휴대폰이 상용화되던 시기도 아니었고 할머니가 일하는 식당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딸꾹질까지 하며 계속 되풀이했다. 3학년 5반 도선주, 3학년 5반 도선주예요. 주인아저씨는 나의 보호자다운 보호자, 그러니까 법적 미성년자가 아닌 진짜 ‘어른’에게 연락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화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그 고등학교로 전화하면 된다는 거지? 하는 물음에는 살짝 난감한 기색까지 섞여 있었다. 어쩌면 본인 선에서 대충 꾸짖고 집으로 보내버릴까, 속으로 고민했을지도 몰랐다. 전화기를 들고 잠시 머뭇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도 그 주인아저씨는 꽤 고집이 있는 편이었고, 화를 내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상황이 우스워진다고 여긴 건지 아니면 아이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게 어른의 의무라고 여긴 건지 잘 모르겠지만, 기어코 처음의 고집대로 도선주 여사의 학교로 연락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은 도선주 여사는 결국 조퇴를 하고 문구점으로 달려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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