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들링

「허들링」 03

by 황윤정

다행히 도선주 여사와 주인아저씨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도선주 여사도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고, 그때는 국민학교였지만, 어쨌든 그 문구점을 자주 이용했었다. 도선주 여사가 허겁지겁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구점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아저씨는 내게 보여주었던 싸늘한 눈빛을 언제 그랬냐는 듯 거두고선 아이고 너였구나, 오랜만이다, 하며 반겼다. 나는 죄송하다며 연신 허리를 숙이는 도선주 여사의 옆에 서서 여전히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반복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함께 용서를 빌었다. 이윽고 주인아저씨가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등의 충고를 하며 사건이 그럭저럭 마무리될 즈음 도선주 여사는 크레파스를 계산하고 가져가겠다며 자신의 책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는데, 나는 그 순간 주인아저씨의 눈길이 천 원짜리 서너 장밖에 없었을 도선주 여사의 분홍색 지갑 속을 재빨리 훑는 것을 눈치챘다. 그 눈길에 담겨 있던 의미를 그때 당시의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무서운 눈길이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돈은 됐다.”


주인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며 책가방 속에서 꺼내 두었던 세일러문 크레파스를 다시 내게 건넸다. 황급히 만류하며 집에 가서 돈을 더 가지고 오겠다는 도선주 여사에게 어허, 하더니 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당부했다.


“오늘 일을 절대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주는 거니까 받아.”


도선주 여사는 집으로 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잔뜩 기가 죽은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각자 생각에 빠진 채 하염없이 걸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도선주 여사와 함께 있으면 늘 조잘조잘 떠들어대곤 했기에 그렇게 서로의 사이에 침묵이 오래 자리 잡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래서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더 이상 울지는 않았는데, 이미 너무 눈이 퉁퉁 부어 지친 탓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침묵의 시간 속에서도 도선주 여사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나는 한 손으로는 도선주 여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크레파스를 든 채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 그날 도선주 여사가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색하게 떨어진 채 걸어갔다면, 어땠을까? 가끔 상상해 보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꼭 붙잡았던 도선주 여사의 손이 지닌 온기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기에 다른 경우의 수를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그만큼 도선주 여사의 손은 ‘어른’이 아닌 열아홉 풋내기의 손이었으나 다른 누구의 손보다도 힘이 있었고 또한 따뜻했다.


우리는 집에 도착해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었다. 그리고 도선주 여사가 공부를 하는 동안 나도 복습과 숙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밤이 깊어 할머니가 일이 끝나고 돌아왔을 땐 둘 다 거실로 나가 할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도 나눴다. 하지만 도선주 여사는 할머니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일’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그래서 나도 굳이 먼저 입 밖에 올리지 않았다. 잘된 일이었다. 할머니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계속 찜찜했는데, 할머니와는 아니더라도 도선주 여사와는 ‘그 일’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잘 시간이 되어 양치와 세수를 한 뒤 나란히 이불 속에 눕고 나서, 도선주 여사가 마침내 내게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크레파스가 새로 갖고 싶었어? 물었을 때 마음이 찜찜했었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물음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선주 여사에게 털어놓았다. 예지가 세일러문 크레파스를 자랑했는데 너무 부러워했던 것 같다고.


“잘못했어, 이모.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 거야.”

“알겠어, 울지 마.”

“진짜야.”


“알아, 믿어.”


도선주 여사는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런데 예지는 누구야?”


“걔 있잖아, 내 뒷자리에 앉는 애. 크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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