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들링

「허들링」 04

by 황윤정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돌아온 예지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이렇게 했다는 둥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무엇을 먹었다는 둥 말끝마다 툭하면 오스트레일리아를 언급하는 게 습관인 아이였다. 입학 첫날 자리가 정해지고 나서 나는 친구를 사귀어 보겠다는 들뜬 마음으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예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너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며? 나름 자기소개를 유심히 듣고 기억하려 애쓴 거였는데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예지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그러고선 오스트리아가 아니고 오스트레일리아야, 오스트레일리아! 하고 스타카토를 찍듯 강조했다. 머쓱해진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름 어딜 가도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서 부끄러웠다. 별일 아닌 일에 무안을 준 예지가 미우면서도 어쩐지 그날부터 힐끔힐끔 예지를 살펴보게 되었다. 예지가 가진 것은 왠지 다 좋아 보였다. 세일러문 크레파스도 마찬가지였고 그 크레파스 낱개 하나하나에 전부 크리스틴이라고 영어로 이름표를 붙인 것도 근사해 보이기만 했다.


“크리스틴?”


“응, 영어 이름이 크리스틴이래. 걔네 엄마 아빠는 다 크리스틴이라고 부른대.”


“그렇구나.”


“이모, 나도 영어 이름 가지고 싶어.”


도선주 여사의 품에 안겨 칭얼거렸다.


“영어 이름? 가지면 되지. 하고 싶은 거 있어?”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줄리아!”


“줄리아?”


그 순간 다른 이름도 아닌 줄리아라는 이름이 하필이면 생각난 이유는 당시 나에게 가장 친숙했던 외국 여자 이름이 줄리아였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도선주 여사와 내가 함께 자는 방의 벽에는 영화 〈노팅 힐〉의 포스터가 늘 걸려 있었는데, 나는 어려서 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도선주 여사는 그 영화를 아주 좋아했고 특히 주연 배우인 줄리아 로버츠의 팬이었다. 포스터를 제외하고도 도선주 여사의 물건 곳곳에 가위로 예쁘게 오린 줄리아 로버츠의 사진이 붙여져 있었으며 내가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도선주 여사는 줄리아, 줄리아 로버츠야, 하고 알려 주어서 자연스럽게 줄리아라는 이름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따르는 이모가 좋아하는 배우, 게다가 엄청 예쁜 배우의 이름이었으니 당연히 줄리아라는 이름이 멋져 보였고 영어 이름을 만든다면 줄리아가 제일 좋을 것 같았다. 다만 나는 도선주 여사가 줄리아 로버츠를 좋아한 진짜 이유는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사실 도선주 여사는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오디션도 몇 번 보러 가기도 했다고. 고등학교 시절 내내 다이어리에 스스로의 이름을 줄리아라고 적어 두고 스크린 속에 자신이 나오는 것을 상상했다고. 그러나 도선주 여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할머니의 허리가 계속 안 좋아지고 있었고, 할머니가 일을 그만두는 즉시 집에 수입이 끊길 터였다.


“그래, 앞으로 네가 줄리아 해.”


도선주 여사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안으로 들어가 좌우로 데굴데굴 굴렀다. 신이 났을 때 하는 나만의 몸짓이었다. 포근하고 좁은 공간에서 구르다보면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그렇게 여러 번 기쁨의 세리머니를 즐기다 도선주 여사가 이제 그만 자야지, 줄리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다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예스! 일부러 영어로 대답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피곤했었는지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그날에 관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부였다. 자다가 설핏 눈을 떴을 때, 잠자리에 누운 뒤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눈을 뜬 채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도선주 여사를 보았던 것 같기도 했지만, 그리 명료한 기억은 아니기에 실제인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날을 시점으로 나는 줄리아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단 한 번도 남의 물건에 손대는 일 없이 성장했으며, 도선주 여사는 더 이상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배우를 꿈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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