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름다운 벗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

by Argos ryu

우리가 나고 자란 T시는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곳이였다. 특히 우리가 속한 학군은, 고교 평준화가 시행된 지 스무 해가 다 되어가던 시절임에도 학교당 서울대 진학생이 스무 명을 넘길 만큼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진학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런 학군 내 분위기 속에서 각 학교들은 상급학교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저마다 다채로운 집중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 중 일부는 학교재단과 학부모, 동창회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학업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한 반에 끌어모아 속칭 '서울대반'이라는 것을 만들고 학교 내 기숙사를 설치해 먹이고 재우며 소위 '명문고'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진학지도를 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고2때부터 평일은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토요일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전원을 학교에 모아두고 돌리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많지 않은 학급 수에 고2때부터 학교에 내내 모여 살다 보니 동급생들은 물론이거니와 후배들까지도 웬만큼 얼굴이 눈에 익어 우리는 새해가 되어도 별다른 변화없이 매일 똑같은 시공간에 속에 갇혀 살고 있었다. 굳이 다른 것이 있다면 올 해는 신학기의 시작이 예년보다 한 달 빠른 2월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뿐이었다. 우리 학교는 예비 고3들에게 미리 입시의 긴장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겨울방학을 열흘 정도로 짧게 주고 한 달 먼저 학생들을 학교로 불러들여 '자율학습'이라는 이름 하에 '강제자습'을 실시하였다. 특히 그 해 겨울은, 이듬해부터 시행될 새로운 대학입시 제도로 인해 우리는 재수가 불가능한 세대로 여겨져 학생도, 학부모도, 선생도 모두가 하이톤으로 조율된 기타줄처럼 팽팽한 입시긴장감 속에 잔뜩 조여져 있었다. 그 해는 그저 그렇게 반복되는 그냥 그런 한 해가 아니었다.


“인마들아. 올해 바짝 해서 끝내야 된다. 내년부터 수능에 본고사에... 마, 아서라. 내년에 수학능력시험

칠 생각은 아예 접어라.”


겨울방학임에도 매일 아침 여섯 시도 되기도 전에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이 추운 겨울방학에 따뜻한 이불 속을 벗어나 학교로 가야만하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모두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기에 나도 별

다른 생각없이 매일 새벽 두터운 외투를 여며입고 오른쪽 어깨엔 책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을, 왼쪽어깨엔 도시락 세 개가 눌러 담겨진 가방을 짊어진 채 버스에 올랐다.

학교에 도착하면 대략 여섯 시 사십 분. 그때부터 속속 등교하는 아이들과 석유난로가에 앉아 아무 말이나

섞어가며 자습 준비를 하다 보면 일곱 시부터 0교시 자율학습이 시작되었다. 연초여서 그런지 학교 전략 탓인지 아니면 정말 이젠 고3이 되었다는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자율학습 분위기는 여느 때하곤 전혀 다르게 모두 자못 진지했다. 나는 대개 좋아하던 과목, 국어나 문학으로 자율학습을 시작했는데 0교시가 끝나면 담임 선생께서 당최 무슨 내용인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장황한 이야기를 한 십여 분간 하셨고 그 때 쯤이면 어김없이 영일이 교실 뒷문을 조심스레 열고 살포시 교실로 들어오곤 했다.


드르륵.


“어이구, 이이구. 이거 언제 정신 차릴라꼬 카노. 새해가 되도, 고3이 되도...언제 인간 될라꼬.”


담임 선생 왼쪽 겨드랑이에 늘 끼여 있던, 부러진 당구대로 만든 지휘봉이 영일의 머리를 두어 번 새벽종

치듯 때리고 나면 1교시가 시작되었다. 영일은 아버지의 전근으로 가족이 지방으로 이주한 터라 학교 정문에서 아이 걸음으로 걸어도 오 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집에서 혼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한 시간쯤 지각을 했다. 그럼에도 늘 여유롭고, 당당하게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일과 나는 2교시가 끝나면 늘 나란히 붙어 앉아 도시락을 까먹곤 했다. 아침을 먹고 올 리가 없는 영일은 그때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만 했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인근 반 친구들과 늘 운동 시합을 벌였던 나는 도시락을 그 때 비워야만 했다. 내가 싸 온 솜씨좋은 어머니 반찬을 그리워하던 영일과, 영일의 인스턴트 깡통류와 조미김을 기다리던 나. 점심시간이 되면 두터운 파카를 솜이불 삼아 덮어쓴채 엎드려 꿀잠을 자야하는 영일과 매일 운동시합이 있던 나와의 기막힌 콜라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뒷자리에 앉아 자습을 하고 있던 성구가 내 등을 쿡 찔렀다.


“야, 영일이 일마도 농구 꽤 한단다. 점심시간에 시합 하나 끼워 돌라 카는데.”


나는 영일을 슬쩍 살펴보았다. 새까맣고, 키는 작고, 몸은 빵빵했다. 전혀 운동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키 작은 바클리네.”


성구가 “큭.” 하고 외마디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 누고. 일 나와.”


자습 감독 중이던 수학 선생이 입가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있는 성구를 차분히 내려다 보았다.


“이 자슥이 돌았나. 실실 쪼개는 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구의 아구창이 두 바퀴 돌아갔다. 일년에 두어번 씩 학생들 고막을 날린다는 전설이

있는 수학 선생의 명성엔 이르지 못하는 싸대기 수준이었지만 이것도 연초라 생각하면 이해못 할 일은 아니었다. 우리도 선생들도 모두 새로운 학기를 위한 동계훈련 또는 시범경기 중이었다.


“저 뒤에 가서 엎드려 뻐쳐.”


성구의 볼은 수학 선생의 손바닥 자욱에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지만 이 상황이 재밌는지 성구의 입가엔 여전히 장난스러운 웃음이 맴돌고 있었다.


점심 종이 울리자마자 우리는 외투를 벗고 농구공을 들고 불이 나게 튀어나갔다. 오늘은 옆 반과의 시합이 있는 날이었다.


“오늘은 짱구, 니가 후반에 뛰고 영일이, 니가 전반에 한 번 뛰라. 단디 해라.”


학교에서 밥만 먹고 잠만 자는 놈치고는 영일은 농구를 꽤 잘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영일은 나이차이가 꽤

나는 형들과 눈만 뜨면 하던 게 구기운동이었다고 했다. 고행석 화백의 만화주인공 구영탄처럼 꺼벙한 눈을 가진 놈이었는데, 공이란 공은 모조리 잘 다루었다. 그 날 시합을 이겼는지 졌는지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지만 친구들이 영일의 농구실력에 대해 꽤 놀랐다는 느낌은 아직도 기억 저편에 생생히 박혀져 있다.


저녁은 8교시를 마친 오후 다섯 시에 먹었다. 식을대로 식은 마지막 도시락을 비운 후 찬공기가 밀려 들어

오던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나는 늘 황량한 운동장 스탠드에 홀로 서서 멍하니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 보는 것이 나는 무척 좋았다. 가끔 적적해지면 좋아하던 록 그룹의 노래를 혼자서 “우—우—아!” 하고 목이 터져라 불러 보기도 했다. 저녁 바람에 운동장의 모래와 자갈들이 소용도리치며 날아가곤 했는데 난, 때로는 사는 일이 저 운동장에 굴러다니는 자갈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저녁 여덟 시가 넘으면 집중력이 현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 시간만 더 버티면 집에 간다는 기대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등교한 지 열두 시간이 넘은 몸이 먼저 지쳐버렸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무렵엔교실의 긴장도도 함께 느슨하게 풀려 나가곤 했다. 그 때 즈음이면 성구는 갑자기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조간신문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읽곤 했다. 무엇 때문에 그걸 보는지는 몰랐지만, 그는 마치 교장선생같은

엄근진 모습으로 꽤 진지하게 신문을 부스럭거렸다.


“쾅!”


당직 선생이 교실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거기, 신문 편 놈 나와!”


당직 선생은 성구의 신문을 당구대로 집어 올렸다.


“이 쉐이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선생은 성구의 한쪽 볼을 움켜쥐고 앞뒤로 거칠게 흔들었다. 그날 분위기로 보아서는 대개 그쯤에서 끝날 수있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맞고, 그 정도로 끝나는 밤. 그런데 그날은 성구가 유난히 대들었다.


“국어 공부하는 중인데에.”

“뭐? 뭐… 뭐라꼬?”

“국어 공부하는 중이라꼬에.”


선생의 남은 한쪽 손이 성구의 볼따구에 붙었다.


“뭐라꼬! 이 쉐이야.”

“국어 공부하는 중이라꼬에!”


성구의 눈에 핏발이 올랐다.


“뭐라 캐샀노. 니는 이래놓고 이게 지금 공부한다카나.”

“예, 신문사설보며 국어 지문 공부하는 중인데예!”


이쯤 되자 선생도 반쯤 미쳐버렸다.


“뭐라꼬!”


선생은 성구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구겨 성구의 얼굴에 던졌다.


“이 쒜이가 돌았나. 너, 이 쒜이. 따라 나와! 따라 나와!”


선생은 씩씩대며 먼저 나섰고, 성구는 입을 삐쭉 내밀고 껄렁껄렁 뒤따라 나갔다. 죽일 테면 어디 죽여

보라는 심사였다. 우리는 무겁게 침묵했고, 교실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한 시간쯤 지나 성구가 다시

들어왔다. 진학지도실에 끌려가서 맞아 죽었겠구나 하는 예상과 달리, 멀쩡해 보였다.


“니 개안나. 뭐라 카든데.”
“안 터졌나?”


성구는 대답 대신 책가방을 조용히 주섬주섬 쌌다.


“별말 안 하는데.”


그리고는

“내일 보자.”


그 한마디만 남기고 아직 삼십여분 남은 야간자습을 마치지도 않고 종례도 기다리지 않은 채 먼저 가방을

둘쳐메고 집으로 갔다.


"일마 니 어데 가노?"


성구는 내 말을 들은 척 만척했다.

"절마 저래 집에 가는 기가?"

"몰래, 아 절마 또라이네"


조석으로 두어 번 터져 심신이 지쳐서 그랬는지 아니면 순수하게 집에 일찍 돌아 가고 싶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성구는 그렇게 가버렸다. 성구가 가든지 말든지 우리는 삼십분 남은 시간을 좀 더 버텨내야만 했다. 아이들의 온기로 잔뜩 흐려진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떠오르던 교실이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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