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 씨를 만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건설 현장에서였다. 일을 하면서, 또는 쉴 때에 구 수하면서 은근하고 약간 얄미운 느낌이 드는 최 씨의 경기도 사투리는 계속 이어졌다.
“내가 소사읍에서 S제과에 다닐 때엔 날 보고 오빠라고 부르는 애들이 많았어. 내가 잘났던 건 아 니고 다른 이유가 있었지.”
제과 회사에서 야근을 끝낸 여공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건 저녁 열 시쯤이었지. 내가 늘 다니던 과 수원 사이로 난 소릿길로 접어들 때면,
‘오빠 같이 가요.’ 소리치며 대여섯의 여공들이 뛰어온다. 하루 동안 힘들었던 얘기며 재미있었던 일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같이 걷고 싶어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어.
그때만 해도 소사 읍내에는 가로등도 그리 충분하지 않았고 밤길은 너무 한산해 여공들의 퇴근 길에 성가시게 구는 총각 애들이 있었어. 남자인 내가 앞서서 걷다가 그 애들을 만나 보니 모두가 다른 회사에서 나와 같이 근무했던 애들이었어. 내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눈 그 애들은 내가 우리 파트 여공들과 함께 퇴근하는 길이니 다음부터는 얼씬도 말아달라는 나의 간청을 백 프로 들어주 었지. 말 그대로 나는 그 방향으로 출퇴근하는 여공들의 수호신이 되었어. 때로는 선배 사원으로 서의 도움말도 아끼지 않았고 일할 때 힘들었던 이야기 고향 이야기도 서로 나누며 제법 괜찮은 선배 남자로서 친해졌지.
그러던 중 어느 아이가 괜찮은 사람이니 한번 사귀어 보라고 여자 하나를 소개해 주었지. 이름은 경자. 외모는 미스코리아 감은 아니지만 그리 밉상은 아니고 말수도 적고 아주 착해 보여서 한참 을 만나다가 제대로 정이 들어 버렸어.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엄마 사이에 일본에서 태어나 광복과 함께 한국에 와서 살게 되었고 아 버지는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시고 엄마도 삼 년 전에 돌아가셔서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에 혼자 살 고 있었고 여고 졸업 후 직장도 없이 이런저런 취미 생활을 하며 몹시 외롭게 사는 처지였어. 얼 굴과 외모도 보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느낌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어.
몇 달을 만나며 사귀던 끝에 둘이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지. 경자는 혼자이지만 나는 부모님이 계시니 우선 모두 같이 만나보기로 했어. 특히 사촌 동생 선희가 오빠 신붓감 만나는 데 자기가 빠지면 안 된다고 앞장을 섰어. 날짜 잡고 조용한 식당 골라서 다섯 명이 함께 만났지. 모두가 식 당에 들어서 인사도 나누기 전 선희와 경자는 소리쳐 놀랬어.
“아니, 너야?”
둘이가 너무 놀라는 바람에 상견례를 대충 치르고 경자를 보내고 집에 오는 길에 사촌 동생 선희 는 펄펄 뛰었다.
“오빠, 이 결혼 절대 안 돼. 저 애가 어떤 앤지 알아?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결혼 절대로 성사시 킬 수 없어.”
선희의 말을 듣고 나니 식당에 같이 앉아 있을 때 경자의 얼굴이 낙심한 표정이 지나갔던 것 같았 어. 사촌 동생 선희는 자세한 얘기를 풀어놓았어.
소사 여고 시절 전교생에게 낯이 익은 두 얼굴 그것은 경자와 선희였다. 선희는 당시 잘 나가던 소 사 여고 배구팀의 주장 선수였고 경자는 소사읍 고교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바람둥이 여자 애였어. 선희의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께서는 이 결혼 절대 안 되는 걸로 못을 박았지. 나야 물론 경자를 좋아하는 마음 변함없지만 부모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그 뒤로도 경자와 나는 자주 만났고 서로 좋아하는 마음도 변치 않았어. 자주 만나서 시간을 보내 면서도 경자와 나는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 얼마 후 경자는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았지. 아버 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계신 가정에서 경자는 몹시 엄격하게 자랐대. 엄마의 교육 자 세는 준엄할 정도였대. 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혼자 열심히 살아가던 중 고2쯤인가 일 때 밤길 에 세명의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대. 죽을까도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대. 그 뒤로 경자는 공부 에 전념하기보다는 내 몸을 지키기 위해 호신술을 열심히 배웠대. 태권도, 유도 등 유단자가 되었 고 방탕하고 무질서한 생활이 절대 아닌 조신한 여자로서의 태도를 가꾸기에 전념을 했대. 그리 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꿈이었대. 나는 잠자코 듣고 있을 뿐 할 말이 없었어.
“경자,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건 아니야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연구해 보자.” 나도 나지만 경자의 처지가 몹시 안타까워졌지.
그렇게 그렇게 만나던 중 경자는 중대한 결심을 말했어.
“오빠, 우리 결혼해요. 아무도 모르게 그냥 우리끼리 결혼해요. 결혼해서 100일만 같이 살아요. 오빠 인생에 한점도 누가 안되게 해 드릴게요.”
경자의 말투는 단호했어. 어떤 이유도 사정도 개입될 수가 없었어. 그렇게 또 몇 주가 지난 뒤 제 과회사 여공 하나가 쪽지를 전했어.
“오빠, 오늘 저녁에 꼭 와줘요.”
“왜일까? 집에서 만난 적은 별로 없는데” 궁금한 마음으로 경자의 집으로 갔어.
깨끗이 정돈된 방 한가운데엔 작은 상위에 냉수 한 그릇이 놓여있고 작은 상자가 두 개 놓여있었 어.
경자는 두 개의 상자 속에 물건들을 꺼냈어. 하나는 남자의 혼례복인 사모관대였고 하나는 여자 의 혼례복인 원삼 족두리였어. 둘이는 혼례복으로 갈아입고 맞절을 했어. 경자의 태도는 한마디 의 말도 끼어들 수 없도록 너무나 진지했어.
그날부터 우리의 신혼생활은 시작됐어. 살림하는 모습이며 남편 건사하는 경자의 손길은 너무도 섬세했어. 아침 출근길에 들려주는 도시락엔 정성이 듬뿍 들어있고 저녁 퇴근하여 들어가는 우리 의 신혼방은 너무도 포근했어. 부모님께서는 선희를 보내어 온갖 걱정과 회유 말씀을 전하셨지 만 나와 경자의 눈과 귀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 남편인 나를 출근시키고 집안 청소며 정 리를 하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정말 감동이었어. 제과공장 동료 여공들
은 모두들 부러워했지. 참으로 꿈같은 시간들이었어. 그러던 중 어느 날 저녁 경자가 말했어.
“여보 오늘이 우리 결혼생활 마지막 날이에요. 내일부터는 우리는 남남이에요.”
나는 할 말이 없었어. 애초에 약속한 100일이 다 끝난 것이야.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로 하얗게 새운 그날 밤은 너무도 길었어. 아침 출근길 도시락 가 방을 건네주며 마지막 인사는 간단했지.
“잘 가요.”
“그래, 잘 있어.”
하는 수 없이 저녁에는 부모님 계신 집으로 들어갔지. 이제 모든 것이 끝났음을 말씀드리고 다시 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어. 모든 것을 빨리 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어. 그래도 마음으로는 무척이나 힘들었지. 퇴근길에 동료 여공들도 내게 한마디 말도 안 나누었지.
그래 저래 한 주일이 지났어. 아침 출근길 경자와 가까웠던 여공 하나가 새하얘진 얼굴로 뛰어왔 어.
“오빠! 경자 언니 죽었대요.”
“뭐야, 무슨 소리야?”
나는 단숨에 경자의 집으로 뛰어갔어.
경자의 집에는 경자의 작은 아버지 내외와 경자의 사촌들이 모여있었어. 잠자는 듯 누워있는 경 자의 머리맡에는 간단한 편지 한 장이 있었고.
‘여보 나 먼저 갑니다. 지난 100일 동안 신혼생활이 너무 행복했어요. 봉투에 적은 돈을 넣었어 요. 나의 장례비로 써줘요.’
어떻게 했는지 경찰 조사도 끝나 매장 허가도 떨어졌다고. 친척들은 장례 등 모든 절차를 내게 미 루고 경자 엄마가 물려준 집 두 채와 돈이 될 수 있는 집기 등 챙기기에 급급한 모습들이었어. 나 는 급히 인부 서넛을 얻어 경자를 양지바른 골에 묻어 주었어. 봉투 속의 돈은 일을 치르고도 남 아 잔금은 인부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지.
이게 다야. 내 첫사랑 이야기. 나는 잊어버리기에 열심히 노력했지. 기억한다는 것이 너무 아프 고 힘들어 완벽하게 잊으려 노력했지. 묘지의 위치 등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한 번도 찾아본 적 없어.
긴 이야기가 끝나고 허탈한 웃음을 짓는 최 씨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