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기술 발전이 실로 놀랍다. 언젠가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거란 예측을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지만, 로봇보다 인공지능에 의한 대체가 더 빠를 것 같다.
Chat GPT(이하 챗지피티)란 무엇인가. 챗지피티가 직접 말하는 정의는 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라는 생성형 사전 학습 변환기에 대화 능력(Chat)이 추가된 버전을 뜻한다. 쉽게 비유하면 아이언맨의 충직한 인공지능 비서인 자비스의 채팅 버전이다. 흔히 정보를 찾아주고 가공해 주는 가벼운 역할로 착각하기 쉬운데, 인간처럼 학습하고 창작하고 분석하고 조언까지 해주는 역할을 아울러 해결하는 만능 인공지능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챗지피티를 실제 업무와 일상에 활용한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제 챗지피티가 없으면 일을 하기 힘들다는 사람도 있다. 나조차도 챗지피티가 사라진 업무 환경을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이 녀석이 보고서도 쓰고, 콘텐츠도 쓰고, 아이디어도 내고, 일정도 짜준다.
결과적으로는 편해졌는데, 마음 한편이 어딘가 씁쓸하다. 글 쓰는 게 업인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인간의 영역인 줄로만 알았던 창작까지 챗지피티가 완벽하게 수행해 내면, 나는 무엇으로 밥을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아직 챗지피티는 완벽하지 않다고 말한다. 분명 도움은 되지만, 가끔 걸림돌을 만들기도 한다. 이 녀석이 제공하는 정보는 정확할 수도,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팩트(Fact) 체크를 기반으로 하는 일을 한다면, 챗지피티에 모든 걸 맡기는 행위는 위험하다.
애초에 정보란 진실인 것과 진실이 아닌 것을 판명하기가 힘들다.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러한 경험조차도 상황과 관계,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은 믿을 수 있음과 동시에 믿을 수 없다. 사람도 그러한데,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 만져보지 못하는 인공지능이 진실을 가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신 인공지능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사용해 진실을 가려낸다. 과학에서 반복 실험과 그를 통해서 도출해 낸 증거가 진실의 기준이 되듯이, 다수의 데이터나 여론은 현시점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는 합의된 사실을 가리킬 수 있다. 그렇게 판명된 정보가 객관적인 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과연 챗지피티가 제공하는 정보의 진실성과 신뢰의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 내가 어떤 질문을 하거나 정보를 요구했을 때, 챗지피티는 인터넷, 책과 출판물, 공공데이터, 실시간 웹 검색을 통해 결과물을 도출해 낸다. 챗지피티가 직접 말하는 신뢰의 수준은 일반 상식의 경우 매우 높고, 철학적 논의는 주관적일 수 있으며, 법률과 의료 같은 까다로운 분야는 제한적으로 나온다. 나름의 보험이랍시고 '출처의 신뢰가 항상 균일하지 않다'고 밝혔다.
사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정보를 찾아냈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문제다. 챗지피티의 한계라기 보단 정보의 한계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완벽할 수 없음은 인간이 완벽할 수 없음과 동일하다. 한 번은 정보 수집을 위해 해외 사이트를 뒤지다가 더는 찾을 수 없어서 챗지피티에게 질문했는데, 내가 찾은 정보와 완전히 상이한 결론을 내놨다. 그래서 "확실하냐"고 지적하니, 이번엔 내가 조사해서 쌓은 정보와 비슷한 내용을 가져왔다. 다시 한번 지적하니, 또 완전히 새로운 정보를 내놓기도 했다. 만약 내가 첫 번째 대답만 듣고서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였다면, 그리고 그걸 업무에 활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처럼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비서로서 챗지피티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인간이 직접 개입해 사실 체크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활용할 수 있는 정보로서 쓰임새가 있다. 창작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휴먼 터칭(Human-Touching)이 들어가야 비로소 완성된다.
진짜 내가 걱정하는 것은 창작의 영역이다. 이젠 AI가 그림도 그리고, 소설도 쓰고, 노래도 만들고, 영상 편집도 한다. 창작과 예술의 분야야말로 인공지능이 개입할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측이 점점 뒤틀리는 모양새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승리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예술은 창작자의 고뇌와 심오함이 깃들어있는 결과물이고, 우린 그 작품에 열광한다. 작품 그 자체만 좋아하기보다, 창작자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창작자의 매력과 세계관에 매료되어 찬양한다. 봉준호의 작품성을 치켜세우고, 에스파의 팬덤이 조성되고, 한강의 소설 전권을 사 읽는다. 과연 인공지능의 작품을 찬양하고 팬이 되는 사람들이 나타날까. 그게 주류가 되진 않을 것이다.
나는 평소 업무와 여러 가지 정보가 필요할 때는 챗지피티를 적극 활용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에세이를 쓰거나 소설 집필과 같은 창작 업무에는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정보 수집을 해야 할 때만 간헐적으로 사용할 뿐, 나의 창작물에 쓰인 단어나 문장은 챗지피티의 것이 아니다.
창작자의 주관이 고스란히 담기는 글쓰기의 영역에서까지 챗지피티는 탁월한 보조자의 역할로서 듬직하게 자리한다. 이제는 챗지피티가 없는 일상을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챗지피티가 지배한 일상을 상상하는 것도 힘들다.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챗지피티는 보조자의 역할이지, 주인공으로서 활동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챗지피티의 발현이 우리에게 이로운지, 그렇지 않은 지까진 잘 모르겠다. 아이언맨의 비서 자비스는 처음엔 토니 스타크의 조력자로서 그쳤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지구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단일 개체로서 진화했다. 그러다가 엇나간 판단을 한 인공지능이 탄생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우리의 인공지능이 과연 어디까지 발전하고,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