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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함의 미학, 자유의 역설

패스 오브 엑자일 2 게임 리뷰

by 랑글렛




1. 《패스 오브 엑자일 2 (POE2)》의 자연스러운 스며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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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은 어두침침하고 혼란하다. 아무런 설명 없이 교수대에 묶여있는 캐릭터들을 보여주고, 그 중 하나를 고른다. 그러면 바닥이 열리고 묶여있던 자들이 중력으로 떨어진다. 선택받은 자는 밧줄이 풀려 살아나고, 도망치기 위해 거친 물살에 뛰어든다.


눈을 뜨니 어느 어두운 숲이다. 기절해있던 생존자가 힌트를 준다. 강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들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갑자기 죽은 시체가 살아나 생존자를 물어뜯는다. 시체를 죽이고 손쉽게 무기를 얻는다. 어둠을 밝히며 숲을 헤쳐 나간다. 출몰하는 몬스터를 잡고 이동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을에 도달하게 된다.


<POE2>는 텍스트를 읽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목표가 제시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동과 사냥에 집중하다보면 이야기가 어느 샌가 흘러가 있다. 퀘스트가 자연스럽게 주어지고, 플레이어가 따로 해석하지 않아도, 열심히 싸우다보면 해결된다. 내러티브의 흐름과 성장이 ‘사냥’과 ‘이동’만으로 해결되는 단순한 구조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작했는데, 따로 무언가를 찾아보지 않고도 몇 시간을 플레이하며 멈춰선 적이 없다. 맵도 복잡하지 않다. 어디로 가라는 말을 듣고 찾아가는 게 아니라, ‘여기로 가면 되나?’라는 느낌이 들고, 지도를 밝히다보면 목표가 나타나는 방식이다. 별도의 가이던스로 유도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유저가 따라가게끔 만든다.


이해할 필요 없이 어느 순간 적응해 있다. 게임은 목적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지만, 암시와 길의 형태를 통해 설계되어 있는 흐름을 타게끔 유인한다.



2. 디아블로(Diablo)와의 차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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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2>는 전형적인 핵앤슬래시(Hack & Slash) 장르다. RPG와 뿌리는 같지만 플레이 리듬과 전투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핵앤슬래시는 ‘한꺼번에 몰려드는 적을 베고, 쓸고, 파괴하며 진행하는 구조’를 의미하며, ‘전투 → 루팅 → 강화 → 전투’라는 단순한 흐름이 특징이다. 탐험을 하며 스토리를 전개하는 RPG의 공식과는 다르게, 시스템 자체의 재미가 강조되고, 빠르고 반복적인 전투 중심으로 중독성이 강하다.


핵앤슬래시 장르는 서사의 비중은 낮추고 시스템의 몰입을 강조한다. 때문에 세계관과 스토리는 단순하다. <POE2>는 부패한 세상의 근원을 멈추려는 이야기이고, 디아블로도 선과 악의 대립이 기본적인 스토리 골격이다. 단순명료한 대립관계는 복잡한 이야기를 끼워 넣지 않아도 설득력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다.


게임이 단순하기만 하면 금세 지루해진다. 플레이어가 고민할 영역을 쥐어줘야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POE2>는 복잡한 아이템과 스킬 빌드로 차별화를 꾀했다. 디아블로는 클래스별로 스킬 트리가 고정되어 있는데 반해, <POE2>는 스킬젬을 모든 클래스가 공유하며, 사실상 제한이 없는 조합이 가능하다. 패시브 스킬 트리만 해도 수천 개의 노드가 있고, 아이템 조합(젬 장착)과도 연계되어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캐릭터의 ‘성장’을 좌우한다.


이처럼 무한한 시스템적 자유도는 디아블로와는 성격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게임임을 말해준다. 디아블로는 ‘성장하는 영웅’이라는 서사를 강조하며 유저가 고민하고 설계해야 하는 영역의 편의성을 대폭 단순화했다. 부담을 줄이고 즉각적인 쾌감에 집중토록 한 것. 속도감도 더 빠르고 쉽게 몰입된다.


<POE2>는 고민의 영역을 자유롭게 풀어뒀다. 유저가 스스로 빌드를 설계하여 효율성을 찾아내도록 유도했다. 어떤 젬 조합이 전투를 쉽게 만들고, 더 강해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아가기 위해선 게임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불가결하다. 플레이어간 거래가 가능하고, 제작의 비중도 높다. 게임 내 경제도 자유시장과 같이 순환한다.



3. 자유 같지 않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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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높은 자유도로 디자인되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무한한 선택지에 대한 정답이 이미 있다. 스킬젬, 패시브 트리, 제작 등, 내가 원하는 대로 설계한다고 해서 같은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사실상 ‘메타 빌드’가 존재하며, 밸런스는 한정적이다.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조합해보다가, 한계에 봉착하고 나면 상위 플레이어들이 만들어놓은 패턴을 따라하게 된다.


인간은 완벽한 자유를 맞이하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게임에서 이러한 자유는 불친절함으로 다가온다. 게임의 세계관을 둘러싼 혼란이 유저의 심리에도 쌓이게 된다. 타인의 빌드를 참고하는 순간 이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시스템적인 모순이다.


물론 꼭 남을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다. ‘효율’과 ‘최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게임을 진행해도 무관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수천 가지 조합의 복잡성 앞에서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전까지는 노력과 고민으로 이를 타개해왔지만, 높아진 장벽을 뛰어 넘기엔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 순간 게임을 멈추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화면 캡처 2025-11-01 202223.jpg POE2 추천 빌드 사이트 (https://mobalytics.gg/poe-2)


다행히 외부에서 정답을 찾을 수 있다. 이미 많은 고수들이 실험을 거듭하며 추천 빌드와 최적의 조합을 보기 좋게 공유해놓았다. 레딧, 인벤 등 커뮤니티도 활발하게 돌아간다. 게임이 아닌 웹사이트를 통해 빌드를 시뮬레이팅해 볼 수 있고, 경제 상황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텍스트가 복잡하다면, 유튜브 콘텐츠를 통해 보다 직관적인 접근도 가능하다.


활발한 커뮤니티의 존재는 게임 밖으로도 흐름을 이어간다는 차원에서는 긍정적이다. 게임 안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도 이야기를 공유하고, 토론하고, 분석하며 ‘확장된 플레이’로서 경험을 이어간다. 하지만 외부로까지 시선을 넓혀야 한다는 사실은 입문자에게 크나큰 진입장벽이 된다. ‘어렵고 복잡하다’는 인식이 새롭게 발을 들이는 유저층을 망설이게 한다. 유속이 느리면 강물은 탁해진다.



4. 개인적인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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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며 RPG는 더 이상 모험이 아닌 숙제로 다가온다. 광활한 지도가 펼쳐진 오픈월드 게임은 시작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피곤하다. 공부가 전제되는 게임이라면 입장부터 망설인다. 읽고 배우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이 플레이 할 수 있는 직관적인 게임을 선호하게 된다.


<POE2>는 첫걸음의 편의성은 분명 잘 꾸려져 있다. 생각하지 않고도 무난하게 잘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단계에 올라설수록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쌓인다. 나아가는 과정이 점차 힘들어지고, 죽는 일이 반복될수록 스트레스 지수가 증가한다. 피곤함을 느끼게 되자 매몰비용은 차치하고, 더 나은 직관적인 재미를 찾게 된다.


이러한 게임적 특성은 유저의 호불호를 가중시킨다. 연구하고 찾아보고 도입하는 재미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더없이 빠져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연스레 낙오된다. 취향만 맞는다면 좋은 게임이다. 시스템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깊이 들어갈수록 재미의 정도와 질도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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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무한하지만, 그 자유를 다루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다. <POE2>는 자유의 세계를 약속하지만, 그 안에서 플레이어는 정답을 찾아 헤매는 인간일 뿐이다. 완벽을 추구할수록 피로해지고, 그 피로 속에서 또다시 완벽을 찾게 된다. 아마 그게 <POE2>의 숙명적인 재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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