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패키지 게임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이유는 보관상의 문제, 기기 호환 등 주로 물리적인 문제에 기인했다.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잘 보존된 패키지를 사거나, 호환되는 기기를 구입한다면). 그러나 온라인 게임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른바 섭종(서버 종료/서비스 종료)은 내가 사랑했던 게임과의 영원한 작별이다.
한때 재미있게 즐겼지만 점점 접속이 뜸해지다가 기억에서 잊혀져버린 게임들. ‘그 게임 아직 잘 있나?’하고 검색해봤더니 내가 모르는 새 섭종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제 그 게임들은 추억만 남은 채 영영 다시 플레이할 수 없다. 카르마 온라인(02~06), 트릭스터(03~14), 레이시티(06~13) 등 내 유년기를 함께했던 게임들은 이제 몇몇 남아있는 동영상으로만 볼 수 있다.
지난해 서비스 종료를 선언한 '테라(크래프톤)'
국민게임 '카트라이더(넥슨)'도 후속작 '카트라이더:드리프트' 출시와 함께 서비스를 종료했다
온라인 게임의 섭종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해 6월, PC MMORPG ‘테라’가 11년간의 서비스 끝에 문을 닫았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카트라이더’도 18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지난 3월 서비스 종료를 알렸다. 90년대부터 우후죽순 출시됐던 온라인게임들 중 상당수가 수명을 다한 채 저마다의 말로를 겪었다.
섭종 이유는 다양하다(운영 문제, 각종 논란, 후속작 출시 등). 그중 가장 대표적인 건 유저 수 하락에 따른 수익성 붕괴로 알려져 있다. 물리엔진과 그래픽, 게임성의 발전에 따라 게임은 나날이 변화하고 업그레이드된다. 유저는 유행과 변화에 민감하다. 오래된 전자기기를 버리거나 교체하듯, 충분히 즐겼다면 미련 없이 새로운 게임을 찾아 나선다.
게임사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수익성이 낮은 게임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섭종은 게임계의 섭리와도 같다. 도태된 게임의 운명은 결국 시간문제다. 유저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기에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가끔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내 게임이 사라지는 건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 든다.
아스텔리아(스튜디오8 개발, 넥슨 서비스(19~20) 스팀 서비스(20~21) 로얄(2020~2021)
지금 소개하는 ‘아스텔리아’는 약 3년 전, 사회초년생이었던 내게 퇴근 후 유일한 힐링이 되어 준 게임이었다. 일반적인 MMORPG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판타지적 세계관에 캐릭터 육성과 협력 플레이가 중심인 게임이다.
다른 MMORPG와의 차별점은 ‘아스텔’이라고 하는 소환수가 있어서 솔로 플레이를 하면서도 파티 플레이를 하는 듯한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 ‘아스텔’은 여느 MMORPG의 ‘펫’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7가지 클래스(나이트, 워리어, 로그, 아처, 메이지, 스칼라, 뮤즈)와 3개의 타입(서번트, 가디언, 세이비어)로 나뉜 소환수가 무려 33가지나 존재했고, 원하는 아스텔을 최대 3명까지 소환해 전투를 할 수 있다.
단순히 ‘조력자’의 위치라고 하기엔 아스텔의 활용범위와 비중이 높다. 단순히 버프를 걸거나 공격지원을 해주는 것을 넘어 내 캐릭터 대신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거나 특정 효과를 해제해주는 등의 개성이 있다. 각각의 아스텔이 갖고 있는 스킬 또한 활용성이 높은 편. 때문에 레벨업을 하고, 보스몹을 잡는 것에 더해 퀘스트를 통해 아스텔을 수집하는 재미도 한몫 한다.
이렇듯 나쁘지 않은 개성과 게임성을 지녔음에도 서비스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출시 전부터 개발 과정(잦은 재개발), 퍼블리싱 등 각종 문제와 이슈가 많은 게임이었다. 2019년 넥슨에 출시됐던 당시 지나친 과금 모델로 혹평을 받았고 경쟁작인 ‘로스트아크’가 출시되자 유저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넥슨판 아스텔리아는 출시 1년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스팀 아스텔리아 상점페이지
그대로 사라질 줄만 알았던 아스텔리아는 놀랍게도 ‘스팀(세계 최대 게임 유통 플랫폼)’에 재출시 됐다. 퍼블리셔인 넥슨의 과금 유도에 불만을 가진 개발사가 직접 북미 서버를 런칭해 운영 하게 된 것이다. 게임은 패키지 형태(스탠다드 29.99달러/벨류 49.99달러/디럭스 79.99달러)로 판매됐다. 패키지로 구매형태를 바꿔서 인지 인게임에서는 특별한(비싸거나 필수적인 과금 유도) 과금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다. 넥슨을 벗어난 게임이 이전과는 다른 착한 과금 모델로 변모해 유저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제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아스텔리아는 스팀에서도 오래가지 못했다.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비스를 종료했다. 잦은 렉(Ping)과 구식 엔진 사용 등 시스템적 문제와 P2W(Pay to Win)을 지향하는 게임성이 오히려 플레이의 지루함을 부추겼다. 지나친 과금 모델에서의 탈피를 외친 게임사는 그 약속을 지켰고, 마니아층도 많이 형성됐다. 하지만 더 발전된 게임의 출시에 대부분의 유저층이 빠져나갔고, 소수의 마니아만으로는 운영을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온라인 게임의 흥망성쇠는 유저의 선택과 소비에 달려있다. 게임 운영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BM(Business Model. 과금 모델)은 너무 나빠도 문제고 착해도 문제다. 작금의 온라인 게이머들은 지나친 과금 모델에 대해서는 엄청난 비판을 가하면서도 적당한 과금 모델에 대해선 호평한다. 작품을 이용하는 소비자의 자세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그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게임의 흥행을 좌지우지한다.
악명 높은 리니지2M의 과금 모델. 그럼에도 매출은 상위권이다.
한 가지 당황스러웠던 지점은, 스팀에 출시한 아스텔리아가 서버를 종료하자 더는 게임을 실행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서비스 형태가 기본적으로 부분유료화라 할지라도 패키지 판매를 했기 때문에 게이머들은 대체로 아스텔리아를 패키지 게임 기반 멀티플레이로 인식했다. 그럼에도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공지와 함께 실행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건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임 패키지가 라이브러리에 버젓이 있는데도 실행이 안 된다니.
조금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지만 문제가 될 부분은 없었다. 스팀에 패키지 형태로 출시됐다 할지라도 온라인 서비스를 하는 게임은 운영사가 게임을 포기하면 서비스 종료를 할 수 있다. 현재 아스텔리아는 계정 라이브러리에 남아있지만 정상적인 실행은 불가능하다(껍데기만 남겨진 격).
서비스종료 공지사항에 달린 댓글. 패키지 구입에 대한 환불 요구가 많았다.
아쉽지만 게임의 주인은 게임사다. 운영의 주체가 게임사라는 측면에서 온전히 게임사의 결정에 따라 이뤄진다. 게임이 더는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게임사는 셔터를 내리는 결정을 하게 된다. 서버 종료 이후, 최소한의 서비스(온라인 서버 이용, 업데이트 등을 제외한)는 가능하게끔 유지하든, 아니면 아예 접속 자체가 불가능하게 막아버리든 모든 결정은 게임사에 있다.
아스텔리아는 스팀에서의 저조한 성적을 타개하고자 국내에서 ‘아스텔리아 로얄’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서비스를 시도했다. 그러나 다시금 돌아온 악랄한 과금 유도가 도마에 오르며 유저들의 직격탄을 맞았다. 게임성과 콘텐츠의 변화도 적어 아쉬움만 남긴 채 오는 4월 14일 서비스 종료를 예고했다.
스팀과 같은 ESD 플랫폼은 우리가 실제로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 플랫폼을 통해서 소유권을 인정받는다. 스팀에서 구입한 게임 또한 영원불멸한 소유는 아닐수도 있다.
수많은 종류의 게임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시대다. 살아남으려는 게임간의 경쟁도 치열하고 다양한 게이머들의 입맛을 맞추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성을 떠나 기업의 상품이라는 관점에서, 소비자의 니즈(needs)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외면당한다. 그런 면에서 섭종은 한때 자주 가던 가게가 어느 순간 문을 닫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트릭스터M. 여전히 가치 있는 IP(지적재산권)들은 모바일 게임으로 개발해 출시하는 것이 요즘의 형세다. 그러나 IP만 활용한 양산형 게임에 불과한 경우가 다수.
온라인 게임의 섭종은 패키지 게임을 잃는 것과는 다른 묘한 감정이 뒤섞인다. 그 속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각별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같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과의 작별인사라는 점에서 유독 뭉클한 감정이 든다. 게임도 일종의 사회나 다름없기에, 오히려 ‘즐거움’을 위해 뭉쳤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아스텔리아 로얄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니 서비스 종료를 앞두고 여러 의견이 보였다. 남아있는 유저가 별로 없는 탓인지 게시물 수가 턱없이 적었다. 개중에선 아쉬움을 표현하는 글도, 혹독한 비판도 존재했다. 게임과 함께 한 희로애락이 희미한 불빛처럼 꺼져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