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치 May 31. 2023

없어도 다 산다.

주소가 없어도 택배만 잘 오더라.


"오빠, 나 직구하게 거기 주소 좀 보내줘."

"Al Zahiya - Al Maiyani St - Al Zahiyah - Abu Dhabi"

"이게 주소라고? 주소 보내줘."

"이게 주소야."


아부다비에 먼저 가 있는 남편에게 레지던스 주소를 달라고 부탁했다.

도로 이름 세 개가 나란히 쓰여있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 세 가지의 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빌딩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심지어 우편번호도 없었다. 아부다비에는 우편번호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와... 내가 이런 나라에 가서 산다고?


반신반의했지만 아들옷을 주문해두었고, 그 사실을 잊은 채 정신없이 나도 그곳으로 출국을 했다.

얼마 후 내가 시킨 물건이 도착했으니 로비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내가 주문한 아들의 옷은 이상 없이 잘 도착했다.


이후 한국에서도 우편물을 몇 번 받을 일이 있었다. postal code엔 00000을 입력하라고 안내해 줬다. 우편번호가 없지만, 물건은 잘만 도착한다.


이사 후 IKEA 온라인숍에서 가구를 주문하는데 '근처에 있는 큰 건물'을 입력하는 란이 있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정보 입력란의 등장에 헛웃음이 나왔다. 몇 개월을 지내고 보니 이 칸이 왜 존재하는지 알게 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없던 길이 생기고, 한 블록 지나면 휑한 땅, 혹은 공사장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도시에서 ‘큰 건물‘은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배달 어플로 음식을 주문한다. 어김없이 배송기사에게 전화가 온다. "주변의 큰 건물이 어디야?" 쥐도 새도 모르게 문 앞에 음식을 두고 간 쿠팡이츠와 배달의민족 기사들에게 익숙했던 나는 급기야 전화에 대고 화를 낸 적도 있다. “내가 주소 입력했잖아!”

 

그뿐인가, 아들이 열이 나서 병원에 가야 했던 날이다. 지도로 검색한 병원 주소는 '소르본 대학 건너편(Opp. to Sorbonne University)'이었다. 공식 문서, 우편봉투 전부 다 동일하게 쓰여있다. 인구가 15만 이상인 도시에서, 그것도 2022년에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이걸 보고 당황스러워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하긴, 나도 내비게이션 어플에 병원 이름을 입력하고 잘 도착했으며, 다른 환자들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돌아간다. 주변엔 수많은 배달 트럭과 오토바이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길을 헤매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질서 있게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아부다비로 이주한 지 6개월. 해외직구를 하며 postal code에 자연스레 00000을 입력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을 한 뒤 배송 기사의 전화에 더 이상 화를 내지도 않는다. 'xx학교 건너편'으로 들어오면 된다며 알려주고,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왓츠앱으로 구글맵을 공유한다. 내 입에서 ‘미친 거 아니야?’하는 소리가 눈에 띄게 줄었다.


엄마가 종종 하던 말이 떠오른다.

"없어도 다 산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세 번째 해외살이가 시작된 이곳, 아부다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