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변호

4막

by 광수

4-1.

수술실의 공기는 늘 그렇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매끄럽게 닦인 금속 기구에 반사되며 눈을 찔렀다. 그는 수술복 차림으로 눕혀졌고, 의사가 마지막으로 설명하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예상되는 위험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곧 마취가 들어갈 겁니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가라앉는 순간, 마음속에서는 ‘이제 다시는 예전처럼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러나 깊은 잠처럼 어둠이 덮쳐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수술은 길게 이어졌고, 깨어났을 때 그는 이미 중환자실에 있었다. 몸에는 굵은 튜브가 몇 가닥씩 연결되어 있었고, 기계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통증은 있었지만 묘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몸의 감각이 더디게 돌아오면서, 그는 비로소 다시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며칠 뒤부터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첫 주사 이후 곧장 속이 뒤틀렸고,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병실 바닥에 흘린 머리카락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딸이 그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레기통에 담아버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일부러 웃어 보였다. 그러나 거울 속 얼굴은 이미 생기가 빠져나간 사람의 것이었다.


방사선 치료는 또 다른 방식으로 몸을 깎아냈다. 치료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한 채 같은 위치로 빛을 맞아야 했고, 반복될수록 시야 한쪽이 희미하게 비어 가는 듯했다. 마치 그림의 일부가 지워지는 것처럼, 시선이 닿는 공간에 공백이 생겼다. 기억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침에 읽은 책 구절이 저녁이 되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아이들과 나눈 대화조차 금세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가 “식사 괜찮으세요?”라고 물으면 “예, 괜찮습니다.”라며 짧게 대답했다. 의사가 병세를 설명할 때도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마치 오래 전부터 예상된 절차처럼 받아들였다. 일상에서 가장 큰 변화는 몸이 무너지는 감각이 아니라, 그 무너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자신’을 깨닫는 순간들이었다.


4-2.

빨래는 여전히 그의 몫이었다. 다만 예전처럼 힘차게 털어 널지는 못했다. 대신 아이들이 옆에 앉아 각자의 옷을 개기 시작했다. 아들은 교복 바지를 접으며, 학교에서 있었던 축구 시합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빠, 오늘은 내가 수비수였는데, 공 막아내니까 애들이 다 소리 지르는 거 있지?” 얼굴은 땀으로 반짝였지만, 목소리는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딸은 옆에서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맞추며, 친구와 다투었다 화해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의 대화가 방 안을 채우도록 두었다. 빨래 더미 위로 얇게 스며드는 햇살이, 그 순간만큼은 병실의 무채색 기억을 덮어주고 있었다.


저녁에는 딸의 숙제를 도와주는 시간이 있었다. 수학 문제집에 작은 숫자들이 줄지어 있었고, 딸은 연필을 쥔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짚으며 물었다. “아빠, 이거는 왜 이렇게 풀어야 돼?” 그는 답을 알려주기보다는 차근차근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딸은 잠시 생각하더니 정답을 적어 넣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빠, 이렇게 잘 가르치는 줄 몰랐어.” 말끝에 스스로 놀란 듯 웃음을 터뜨렸고, 그는 모처럼 아이와 동시에 웃을 수 있었다. 머릿속 어딘가가 여전히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중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침에는 아이들이 먼저 일어나 부엌으로 나왔다. 식탁 위에는 토스트와 달걀 프라이, 작은 김치 접시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아들이 의자에 걸터앉아 “아빠, 오늘은 우리가 먼저 준비했어” 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딸은 수저를 가지런히 놓으며 “이제 아빠 차례야, 앉아” 라고 재촉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식탁을 채운 단출한 음식과 아이들의 작은 손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목울대가 무겁게 차오르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그는 익숙하게 빵을 잘라 한입 베어 물었다.


가끔 병원에 가야 할 때면, 그는 아이들에게 그저 “정기검진”이라고만 말했다. 더 묻는 아이는 없었다. 아이들도 아는 듯 모르는 듯,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만 다짐했다.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이 평온을 끝까지 지켜주어야 한다.


4-3.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아이들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낯설지 않은 발걸음. 그러나 오랜만에 들려온 그 소리에 아이들의 얼굴에는 순간적인 경직이 스쳤다. 곧장 달려가 반기는 대신, 서로 눈치를 본 뒤 조심스럽게 “엄마” 하고 부르며 마주했다.


아내는 문턱에 서서 신발을 벗지도 않은 채 거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웃으며 숙제를 하고 있던 흔적, 탁자 위에 반쯤 개다 만 빨래, 주방 싱크대 위에 놓인 작은 그릇들. 그녀의 시선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훑으며 상황을 가늠하는 듯했다.


“애들이…” 그녀는 한 걸음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목소리에는 단순한 걱정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를 확인하려는 기척이 담겨 있었다.


그는 소파에 기대 앉아 있었다. 시선은 창밖을 향했지만, 아내가 던진 말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냈다. “잘 먹고 있어.”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의지와 동시에 아내와 다시 논쟁하고 싶지 않은 피로가 함께 깔려 있었다.


아내는 잠시 침묵했다. 아이들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웃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딸이 주저하다가 “엄마, 아빠가 아침마다 밥도 해줘.”라고 말했다. 그 말에 아내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아들은 덧붙이려다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잘 지내는구나.” 하지만 눈길은 아이들의 얼굴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 시선은 반가움과 미안함, 그리고 놓쳐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는 아내의 표정을 읽었지만 굳이 말을 더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천천히 접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내가 조금만 더 오래 머문다면, 꺼내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결국 아내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끝을 흐리며 현관으로 돌아섰다. 문을 나서기 직전, 잠깐 멈춰 뒤돌아본 눈빛이 그를 스쳤다. 그 눈빛에는 확신 대신 흔들림이, 미움 대신 불안이 있었다. 오래 묵혀둔 후회가 비집고 나온 듯한 눈빛이었다.


문이 닫히고 발걸음이 멀어지자, 집 안에는 다시 아이들의 작은 숨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만이 남았다. 아이들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아이들을 향해 “숙제 마저 하자.”라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방금 전의 눈빛이 잔향처럼 남아 떠나지 않았다.


4-4.

늦겨울 저녁이었다. 창밖에는 하루 종일 내린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닿은 눈송이가 흩날리며 작은 흔적을 남겼다. 바깥은 차가웠지만, 집 안에는 전기히터의 온기와 음식 냄새가 고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아이들이 준비한 저녁이 놓여 있었다. 국 한 그릇, 몇 가지 반찬, 그리고 아이들이 직접 썰어놓은 과일 접시. 어설프지만 정성이 들어 있었고, 그만큼 따뜻해 보였다. 아이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와 다툰 일, 수업 시간에 웃겼던 일들. 이야기가 이어질 때마다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는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음식 맛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으나,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분명하게 들렸다. 시선은 아이들을 향해 있었으나, 한쪽 시야는 희미하게 가려져 있었다. 수술 이후 남은 공백은 여전히 존재했고, 때때로 화면 일부가 지워진 듯 흐려졌다. 그러나 그는 불편을 드러내지 않았다.


잠시 후 대화가 끊기자,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발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번져 보였다. 시야 결손 탓인지, 빛은 경계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뚜렷하지 않았으나,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는 그 불빛을 잠시 따라가듯 바라보다가, 짧게 속으로 말을 맺었다.


“길지는 않겠지만, 이제야 내 삶을 변호할 수 있다.”


그 말은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용히 번지는 눈과 아이들의 웃음, 따뜻한 실내 공기 속에서 묻혀 흩어졌다. 그는 식탁에 다시 시선을 두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모습은 여전했고, 방 안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그 순간이 길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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