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이목 집중되는 대중음악 축제
단 몇 시간 만이라도 밖에 안 나가면 좀 쑤시는 스타일이지만 매년 2월 초 어느 월요일 오전엔 꼼짝않고 방 안에 머문다.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최고의 음악 시상식인 그래미를 보기 위해서다. 올해도 그 전통은 이어졌고 우리나라 시각으로 2월 3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MNET에서 그래미 시상식을 방영했다. 장염으로 앓는 와중에도 4시간 가까이 노트북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진행은 가수 이상순과 신아영 아나운서, 김영대 음악 평론가가 맡았다.
예년에 비해 조금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그래미가 열리는 크립토닷컴 아레나는 NBA 명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홈구장. 대중문화 중심지 LA의 대형 산불로 막대한 피해를 본 대중문화 중심지 LA를 구원하기 위한 모금이 시상식 내내 이어졌고 아티스트 쇼케이스와 애프터 파티에 사용되는 비용도 복구 기금으로 쓰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q4gjmC-vS8s
엘에이 출신 인디 록밴드 도스(Dawes)와 존 레전드, 브레드 페이즐리, 셰릴 크로등이 도시에 위로와 격려의 의미를 보내는 ‘I Love LA’를 연주했다. 이 퍼포먼스에 얼터너티브 록의 주요한 두 여성 뮤지션 브리타니 하워드와 세인트 빈센트가 뭉쳤다는 점도 인상적. 빈센트는 시상식 전 짤막한 인터뷰에서 향후 협엽하고픈 아티스트로 하워드를 꼽기도 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Best Alternative Music Album 후보에 올랐다. 세인트 빈센트가 이 부문 (All Born Screaming으로 수상) 포함 3관왕에 등극했다. 제니퍼 로페즈를 비롯한 시상자들도 “우린 엘에리를 사랑해요”란 멘트로 도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주요 부문(General Field) 화젯거리는 역시나 켄드릭 라마였다. 드레이크를 향한 촌철살인 디스 곡 ‘Not Like Us’로 금번 시상식 무관에 그친 빌리 아일리시와 팝의 요정 사브리나 카펜터 등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와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를 휩쓸었다. <To Pimp a Buttefly>(2015) 나 <good kid, m.A.A.d city>(2012)같은 명반들이 Album of the Year 못 받아서 많은 팝뮤직 팬들이 아쉬워했는데 두 수상으로 어느 정도 보상 받은 느낌도 든다.
그래미는 역시 공연 보는 맛이다. 2025 그래미에도 멋진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2024년을 뒤흔든 사브리나 ‘Espresso’와 ‘Please Please Please’의 매시업 무대가 상큼했고 화제작 < Alligator Bites Never Heal >로 Best Rap Album을 받은 도치의 카리스마 넘치는 퍼포먼스가 압권이었다. 카디비로부터 트로피를 건네받은 도치는 “1989년 신설 이후 여성 래퍼의 수상은 로린 힐과 카디비 그리고 자신 딱 3명뿐이었다”며 경종을 울렸다. “Swamp Princess”라는 별명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팬덤을 향한 감사를 표한 점도 특별했다.
< Las Mujeres Ya No Lloran >로 Best Latin Pop Album 샤키라는 세월을 잊은 듯 수려한 춤사위를 보여줬다. 특유의 허리 돌리기를 비롯한 고난도 동작을 이어 나가면서도 표정은 여유로움 그 자체, 대가란 말이 절로 나왔다. 찾아보니 1977년생이라고. 신인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린 신예 벤슨 분은 쫙 달라붙는 반짝이 의상에 공중제비까지 두 번이나 돌며 파워발라드 ‘Beautiful Things’를 열창했다. 신인답지 않은 여유가 넘쳤다. 1월 12일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펼친 내한 공연에 못 간 게 괜스레 아쉬워졌다.
매년 그래미의 한 축을 담당하는 추모 시간에선 퀸시 존스 트리뷰트가 돋보였다. 무려 허비 행콕과 스티비 원더가 협업했다. 피아노 작은 의자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퀸시 존스가 편곡했던 프랭크 시내트라의 ‘Fly Me to the Moon’의 행콕 신시아 에리보 버전도 아름다웠다. 영화 <위키드>에서 “엘파바” 역할을 맡은 신시아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관과 상반된 청아한 음색이 매력적이었다.
General Field의 첫 번째 시상 신인상은 채플 론에게 돌아갔다, 그야말로 격전지라고 부를만한 후보 라인업은 ‘A Bar Song (Tipsy)’로 빌보드 싱글차트 19주 1위를 기록한 샤부지와 2024 빌보드 연말 결산 싱글차트 1위 ‘Lose Control’의 주인공 테디 스윔스, 2024년의 신데렐라 사브리나 카펜터 등 쟁쟁했다. 2023년 작 <The Rise and Fall of a Midwest Princess>의 여러 수록곡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채플 론의 수상이 반가웠고 신인 아티스트에 대한 레이블의 처우 개선을 촉구하는 소감도 인상적이었다. 어쩌다 보니 작년 빅토리아 모네에 이어 2년 연속 응원하는 뮤지션이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거대한 분홍빛 망아지와 갖가지 화려한 원색 계열의 오브제가 동화적이고도 판타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 ‘Pink Pony Club’은 캘리포니아 웨스트 할리우드에 있는 The Abbey라는 성소수자 바에서의 경험으로 만든 곡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생전 처음 누군가에게 평가받지 않고 자신이 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론에게 실로 의미심장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채플 론의 성장과 미래가 궁금하다.
누군가의 사진을 흔드는 흥미로운 장면이 몇 차례 보였다. 딱 봐도 내가 사랑하는 브라질 대중음악 거장 밀튼 나시멘토였다. 사진을 들고 있는 대상은 확인 못 했지만 에스페란자 스팔딩이 아닐지 추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맞았다. 사연은 이렇다. <Milton + Esperanaza>로 Best Vocal Jazz Album 후보에 (수상은 사마라 조이의 A Joyful Holiday) 올랐지만 스팔딩과 달리 메인 테이블의 좌석을 할당받지 못했다고 한다. 스팔딩은 인스타그램에 레전드에 대한 예우가 이게 뭐냐며 불만감을 표시했다. 별개로, <Milton + Esperanaza>을 강추한다. 개인적인 작년 최고작 중 하나다.
아카데미상 작품상처럼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Album of the Year는 비욘세가 받았다. 35회로 당당히 그래미상 최다수상자에 올랐지만,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의 아쉬움을 <Cowboy Carter>가 해결해 줬다. <Lemonade>와 <Renaissance>때 못 받은 걸 <Cowboy Cater>로 받은 모양새가 우습다(쿠폰 모아 피자 시켰다 라는 조소도 있었다) 란 평도 있지만 후보군의 다른 음반들이 압도적이지 않았기에 본작의 수상에 수긍하고 박수를 보냈다. 외려 Best Country Album이 약간 석연찮았다. 컨트리 찐팬 혹은 정통주의자라면 크리스 스테이플턴의 <Higher>를 고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시상식 관련 이것저것 잡담을 늘어놓았다.
다음 글엔 본상 이외의 댄스/일렉트로닉, 재즈, 록 등 세부 카테고리에서 흥미로운 수상작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많이들 관심가져 주시길!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