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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베러 맨 >과 로비 윌리엄스 스토리

by 염동교

< 위대한 쇼맨 > 연출한 마이클 그레이시 감독의 < 베러 맨 >은 로비의 유아기부터 전성기인 2000년대 초반까지 다루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로열 앨버트 홀(1871년 완공된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공연장) 콘서트는 스탠더드 팝 싱어의 정체성을 보여준. 아쉽게도 음반은 없지만 2001년 발매된 DVD < Live at Albert >가 있다. 따지고 보면 이 정체성은 경력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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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으로 가득 채운 2001년 작 < Swing When You’re Winning >이 영국에서만 250만 장 가까이 팔리며 전성기를 입증했고 니콜 키드먼과 듀엣한 ‘Somethin’ Stupid’’도 싱글차트 1위에 오르며 프랭크 시나트라-낸시 시나트라 부녀의 영광을 재현했다. 샤를 트레네의 샹송 원곡 ‘La Mer’와 바비 다린 리메이크가 고루 유명한 ‘Beyond the Sea’와 쿠르트 바일이 곡을 쓰고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가사를 지은 ‘Mack the Knife 등 20세기 고전을 복원했다.


이후에도 2013년 앨범 < Swing Both Ways >에서 스윙을 다시금 본격화했다. 루퍼스 웨인라이트와 릴리 알렌, 켈리 클락슨과 마이클 부블레까지 화려한 참여진의 이 음반에서 로비는 어빙 벌린의 ‘Puttin’ On the Ritz’와 영화 1939년 < 오즈의 마법사 >에 실린 ‘If I Only Had a Brain’ 같은 그레이트 아메리칸 송북(20세기 미국의 재즈 스탠더드와 팝송 명곡 모음집) 계열의 작품들을 소화했다. 현재까지 마지막 정규 음반인 2016년 작 < The Christmas Present >도 크리스마스 클래식으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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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윌리엄스의 후기작


민소매 차림의 껄렁한 록스타와 보타이와 연미복의 스윙 싱어. 이런 반전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한 걸까? 답은 아버지 피터 윌리엄스 혹은 피터 콘웨이에게 있다. 프랭크 시내트라와 딘 마틴,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같은 20세기 미국 대중음악 거인들을 신으로 모시는 아버지는 함께 레코드를 듣고 노래 부르며 일찌감치 로비를 조기 교육했다. 몇 안 되는 관객 앞에서도 늘 노래 부르는 걸 즐겼던 그의 DNA가 고스란히 아들에게로 전이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ZbQzLKnExM

영국 프로 축구 FA컵 결승전을 본다는 이유로 떠난 그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지만 로비의 성공 이후론 종종 조력자 역할을 자처했다. 중압감에 억눌린 로비를 위로하고 때론 다그쳤다. 아들이 힘들어할 때 "그래도 널 응원하는 관중을 보라" 힘을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허나 일생일대 목표였던 2003년 넵워스 콘서트를 앞두고 일이 터진다. 연못이 딸린 대저택에서 로비는 눌러왔던 감정을 분출하고 만다. “겨우 몇 명 상대하는 게 나랑 비교가 되는 줄 아느냐”라며 아버지에게 상처를 준다.


둘을 도식화하자면 아버지 피터는 평생 소수 관객 앞에 섰으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있어서 더 자연스럽고 배포가 큰 느낌이라면 재능의 크기는 훨씬 큰 로비는 코카인에 의존할 정도로 대형 관중이 주는 압박감에 치를 떤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아버지의 존재가 로비 윌리엄스 경력과 인생에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다. 거울 속 나, 동일시의 대상과도 같기에 사랑과 증오 모두 클 수밖에 없었다. 아! 결국 로비의 넵워스는 약 38만명 관객 운집으로 역사상 영국 최대 공연 중 하나로 남았으며 이 생생한 현장을 2003년 라이브 앨범 < Live at Knebworth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비의 풍부한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스윙 부면을 대변하는 2001년 작 < Swing When You’re Winning >와 더불어 하이라이트에 둘만한 작품이 이름도 유사한 2000년 작 < Sing When You’re Winning >이다. 경력 내내 셀러브리티들과 자선 축구 경기를 기획하고 고향 스토크 온 트렌트의 작은 축구팀 포트 베일 FC(Port Vale Football Club)의 주주로 있을만큼 축구광인 그답게 < Sing When You’re Winning > 앨범 아트도 유니폼을 입은 로비가 여럿 중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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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의 전성기를 가리키는 지표와도 같은 두 음반


도약과 기상(氣像)의 에너지로 가득찬 오프닝 트랙 ‘Let Love Be Your Enegery’는 가이 챔버스와 로비 윌리엄스 콤비의 파워팝을 대변해 주는 듯한 힘찬 곡조로 서곡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근작 ‘Padam Padam’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듯한 카일리 미노그(두 사람 사이 염문설도 돌았다)와 듀엣한 ‘Kids’와 맨체스터 부근 소도시 너츠포드를 향한 애정을 표한 ‘Knutsford City Limits’까지 흥미로운 작품 한아름이다.


2005년 대한항공 광고에도 사용된 ‘The Road to Mandalay’는 어코스틱 기타의 감성이 잘 살아 있다. 곡이 종료된 후 20분있다가 히든 트랙이 등장해서 처음 CD로 들었을 땐 오류가 있는 줄 알았다. 아이브의 ‘After Like’가 샘플링한 ‘Supreme’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대표곡. 물론 ‘Supreme’도 글로리아 게이너의 명곡 ‘I Will Survive’를 샘플링했지만 ‘After Like’는 로비의 작품과 더 비슷하게 들린다.

로비2.jpg 영화 < 베러 맨 >의 한 장면

런던 웨스트엔드에 위치한 리젠트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수십 명 댄서들이 군무를 펼치는 ‘Rock DJ’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뮤지컬 특성을 가장 잘 표출한 시퀀스다. 막판에 살가죽이 다 벗겨져 근섬유와 해골만 남는 엽기적인 뮤비도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뜬금없이 중지를 들었던 라이브 퍼포먼스도 모두 이 노래에 관한 이야기다.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비롯해 다양한 국가에서 탑10안에 들며 전성기를 상징했던 트랙이다.


영화의 제목이 된 ‘Better Man’은 로비를 대표하는 명발라드긴 하지만 사실 상기한 ‘Rock DJ’나 ‘Supreme’만큼 존재감이 높진 않고 호주 6위와 뉴질랜드 4위로 차트 성적도 잠잠했다. 자신을 불신하고 괄시하는 이들에게 “신이시여,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게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Lord, I'm doing all I can, To be a better man)”라고 고백하는 그. 삶을 통해 끊임없이 증명하고 확신해야 했던 그의 삶에 관한 영화 제목으로 잘 어울린다. 이 계기를 통해 ‘Better Man’의 지명도도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싱글 B면으로 ‘My Way’의 라이브 버전이 수록된 점도 의미심장하다.


영화 전후로 과연 왜 침팬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평범치 않은 선택이 주는 반사 효과를 누렸을 것이다. 거기에 영장류가 가진 묘한 광대의 이미지와 늘 부정적인 의미로 유별나고 남달랐던 로비의 캐릭터를 살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나 싶다. 결정적으로 로비 본인이 직접 연기하지 못 하는 이상, 외모와 행동 양식이 다른 배우가 이 전인미답의 인간을 대체하긴 어려웠을 테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흡사 인간처럼 보이는 이 침팬지는 영국 배우 배우 조노 데이비스의 모션 캡처 연기와 로비 윌리엄스의 목소리 연기에 CGI 기술을 융합한 결과물.



2022년 버밍엄 로비 윌리엄스의 콘서트를 보았다. 도무지 국내에 오지 않을법한 인물이기에 버밍엄서의 2시간이 더없이 달콤했다. 자기소개를 첨부한 ‘Let Me Entertainer’부터 ‘Rock DJ’와 ‘Feel’ 등 히트 넘버를 아우른 2시간은 폭발적인 가창력과 재치 넘치는 코멘트, 역동적인 몸동작 등 왜 그가 지상 최고의 엔터테이너이인지 체감했다. 그는 오는 5월 31일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를 시작으로 < Robbie Williams Live 2025 > 투어를 진행한다.


p.s. < 베러 맨 > 크레디트에 말미엔 자살 예방 상담 전화번호가 나온다. 정확한 의도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로비와 감독 마이클 그레이시의 합의 하에 적용된 부분이며 로비 본인의 경험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우울과 비관이 극에 달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려고 하는 이들에게 < 베러 맨 >은 다시금 손길을 내민다. 당신 곁에 구원자가 있으니 제발 그 생각을 멈추어 달라고.


가장 고약하고 가장 유쾌했지만 무대 공포증과 부담으로 감정의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던 그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거네는 위로의 메시지다. 영화 < 베러 맨 >은 그간의 캐릭터에 기반한 최고의 엔터테이너를 넘어서 감화의 인간 로비, 위로자 로비로 나아가겠다는 징표이자 선언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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