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토마스 베이커(1946 - 2025)
대중음악을 공부할수록 프로듀서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위대한 아티스트들의 위대한 작품엔 늘 위대한 프로듀싱이 깃들었고 1980년대 정체기에 빠졌던 시카고를 구원해 준 데이비드 포스터처럼 위기의 음악가의 구원 사례도 더러 있다. 배우들보다 언급이 덜 되는 영화감독처럼 음반 전반을 관할하고 통솔하는 프로듀서들은 말 그대로 작품의 A부터 Z까지 신경 쓰고, 때론 이 때문에 뮤지션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하나의 위대한 프로듀서가 떠났다. 로버트 머트 랭과 최근 저서 < 창조적 행위 >로 다시금 조명받은 릭 루빈, 메탈리카와 협업했던 밥 록 정도는 아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굵직한 음반을 주조했던 영국 음악인 로이 토마스 베이커가 2025년 4월 12일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14세부터 클래식 명가 데카(Decca)에서 일하며 내공을 다진 로이는 CBS와 Elektra 등 여러 회사를 거치며 명작들에 일조해 왔다.
1970년대의 로이는 글램-프로그레시브 록의 비 밥 디럭스와 스페이스록의 호크윈드 으시시한 오컬트 록의 블랙 위도우(Black Widow) 등 이름값보다도 자신의 흥미를 끌거나, 개인적 인연 있는 아티스트의 작품에 참여했다. 1973년 작 < Gasolin’ 3 > 등으로 1970년대 덴마크 록의 자존심과도 같았던 가솔린의 날개를 달아준 것도 영국 햄스테드 출신 팔색조 프로듀서였다.
초기 경력의 핵심은 역시나 퀸과의 협업이다. 트라이덴트(Trident) 산하의 넵튠(Neptune) 레이블을 세울만큼 이미 궤도에 오른 로이였고 외려 프로 경력이 적었던 퀸 멤버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Bohemian Rhapsody’로 로이 토마스 베이커를 기억하지만 프로그레시브 록 성향의 1973년 데뷔작 < Queen >부터 ‘Don’t Stop Me Now’와 ‘Let Me Entertatin You’가 수록된 1978년 작 < Jazz >까지 전성기를 경유한 5장에 함께했다.
워낙 걸출한 기량의 퀸 멤버들이다 보니 로이와 공동 프로듀싱했지만, 초기 음악색에 로이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바로 오늘 인천 송도달빛공원에서 두번째 내한 콘서트를 펼칠 건스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가 “무덤에 가져가고픈 작품”으로 꼽은, 넥스트가 5.5집에서 앨범 아트를 오마주했던 2집 < Queen 2 >와 ‘Brighton Rock’과 ‘Killer Queen’ ‘Now I’m Here’같은 초기 명곡이 수록된 < Sheer Heart Attack >에서 로이의 정밀하고도 화려한 프로덕션이 유감없이 펼쳐졌다.
로이 토마스 베이커의 사망은이 올해 50주년을 맞은 < A Night at the Opera >의 또 하나 키워드로 이야기되지 않을까 싶다. 퀸의 많은 수작 중에서도 작품성 측면에서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는 < A Night at the Opera >는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색상을 달리하는 다채로운 음악성과 멤버들의 물오른 연주로 ‘Bohemian Rhapsody’ 뿐만 아니라 ‘The Prophet Song’과 ‘’39’, ‘Love of My Life’와 ‘Seaside Rendezvous’ 같은 명곡들을 쏟아냈다.
서두에 프로듀서의 중요성을 언급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들의 지분은 각기 다 다르다. 크레디트에 명기만 되었을 뿐 실제론 밴드와 싸우고 나가서 기여도가 거의 없다시피한 경우도 왕왕 있다. 이런 일들은 보통 훗날 인터뷰나 자서전에서 밝혀지지만. 로이가 < A Night at the Opera >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갖고 어느 정도의 기여도를 냈는지는 더욱 면밀히 살펴봐야겠으나 많은 록음악 사가들이 그의 실험적 록 음악에 대한 노하우와 이해도를 평가하고 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