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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동교 Dec 24. 2021

배창호 감독과 <젊은 남자>

종로 3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배창호 감독의 이야기를 듣다.

종로3가 서울극장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서울아트시네마가 특별한 시간을 준비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배창호의 시네 토크가 마련된 것이다. 배창호 감독의 1994년 작 <젊은 남자>를 필름으로 감상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배창호 감독을 볼 때마다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2015년 지하철 승강장 사고가 추락이 아닌 투신이라는 고백을 듣고 나서부터 그렇다. 각종 시네토크에서 본 그는 넉살 좋고 여유로웠지만, 그 사건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도 점점 그 생각을 덜 떠올리고 있다.     


그에 대한 경외심은 깊다.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의 리얼리즘과 <고래 사냥>, <깊고 푸른 밤>의 대중성, 오락성 등 평단과 관객을 동시 포획한 몇 안 되는 감독이었다.     


불혹을 넘겨 발표한 <젊은 남자>는 색달랐다. 젊은이들의 세대상을 반영한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돋보였지만, 배창호 감독은 X세대나 오렌지족 같은 건 편의상 명칭일 뿐 인물 내면을 들여다보기 어렵다고 일축했다. 록카페와 클럽 등 1990년대 청년문화를 가리키는 여러 장소(이 영화는 거의 다 로케이션으로 찍었다고 한다)가 흥미로웠고 주인공들의 패셔너블한 의상도 매력 포인트였다.     



청춘의 사랑과 욕망을 때론 경쾌하게, 때론 잔혹하게 그려냈다. 뭔가 토니 스콧의 <트루 로맨스>와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도 오버랩된다. 숨이 멎기 직전 선글라스를 쓰는 폼생폼사 장면도 분명 어느 외화에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다양한 레퍼런스가 떠오르지만, 회전 트레킹 쇼트, 급격하게 기울어지는 화면 등 이 영화만의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연출도 더러 있었다.     


극 중 이한(이정재)가 좋아하는 로이 오비슨의 ‘In dreams’가 몇 번이고 흐른다. 굳이 가사를 해석하지 않더라도 구슬프게 떨리는 오비슨의 목소리와 노래 제목만으로도 영화 내용과 잘 어울린다. 하고픈 것이 너무 많았던 이한은 꿈에서나마 그 욕망을 채워야 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질의응답을 시작했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의 김형석 프로그래머가 진행을 맡았다. 배창호 감독은 차분한 말투로 당시의 촬영 현장을 회고했고 독특한 시퀀스들의 연출 배경, 작품의 메시지, 선곡에 관해 일화를 풀어냈다. 배우, 촬영 감독을 비롯한 여러 인물에게 공을 돌리는 대목에서 따뜻한 인품이 묻어나왔다.     


배창호 감독의 최근작은 2010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여행>이다. 두어 번 시네토크로 만난 그는 영화에 대한 열정이 여전했다. 장편 제작을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작품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과정이 여러모로 녹록지 않음을 알지만 70대의 배창호가 그리는 세계관을 만나고 싶다.     


그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한국의 명감독들을 종종 마주쳤다. 박찬욱 감독과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본 설렘, 김지운 감독에게 사인받으며 ‘이름이 멋지시네요’라는 소릴 들었던 순간, 카사베츠 영화를 본 양익준 감독과 동선이 겹쳐 육회 비빔밥집에서 티켓에다 사인받은 재밌는 기억.


종로3가 서울극장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1980년대의 명장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이 마지막이지 싶다. 영화란 예술 장르엔 정말 많은 사람의 노고가 들어가고 그 영광을 감독 한 명에게 돌리는 게 불합리할지도 모르니 작품을 대표하는 한 사람만 꼽으라면 역시나 감독일 것이다. 좋은 작품을 본 직후 감독을 만날 때 그에게서 비치는 후광이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할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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