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나에게 감동과 감흥을 안겨주었던 클래식 음악 11선
돌이켜보면 대중음악만큼이나 많은 고전음악을 들은 2021년이다. 소나타나 교향곡 같은 긴 호흡의 음악을 듣는 데는 충분한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다 듣고 났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말러, 브루크너 등 작곡가를 머리에 떠올린 후 ‘Mahler Best Recording’이라는 식으로 구글링해 대다수가 인정하는 훌륭한 레코딩을 찾는다. 레너드 번스타인,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단골.
사실 작년 12월부터 기획한 글이지만 은근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새 해의 첫 달이 지나기 전에 글을 올리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자 그러면 2021년의 클래식 열한 곡을 소개한다. 곡의 러닝타임, 시대, 작곡가의 국적이 천차만별이지만 나에게 모두 진한 잔상을 남긴 작품들이다.
1. 베를리오즈 – 요정의 춤
엑토르 베를리오즈. 독특한 이름을 가진 프랑스 작곡가의 음악은 왠지 모르게 어려웠다. 제목이 붙은 기악곡을 일컫는 표제음악(예를 들어 베토벤 교향곡 6번 작품 68 ‘전원’). 그러한 표제음악을 개척했다는 ‘환상교향곡’도 귀에 달라붙지 않았고 다른 곡들도 글쎄였다. 하지만 <클래식 명곡 베스트> 따위의 컴필레이션에서 발견한 ‘요정의 춤’은 달랐다. 성악곡 ‘파우스트의 겁벌(La damnation de Faust, Op.24)’안에 들어간 이 곡은 숲속을 날아다니는 요정의 신비로운 이미지가 펼쳐진다. 밤에 샤워할 때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참 좋더라.
2. 림스키코르사코프 - 세헤라자데
림스키코르사코프 하면 즉각 떠오르는 곡은 ‘왕벌의 비행’이다. 크로아티아의 미남 피아니스트 막심 므라비차의 내한 공연에서 더욱 현대적인 편곡으로 처음 만난 이 곡을 잊을 수 없다. 초절정 기교가 빛나는 작품.
하지만 이번에 소개할 곡은 ‘세헤라자데’ 이름부터 뭔가 아랍틱하지 않는가. 실제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고국 러시아가 생각 안 나는 이국적 사운드로 가득하다. 롯데월드에 있는 놀이기구 ‘신밧드의 모험’을 타고 어느 아랍 지방의 강줄기를 따라 노 젓는 상상이 든다. ‘세헤라자데’는 ‘스페인 기상곡’ 및 ‘러시아 부활제 서곡’과 더불어 작곡가의 ‘3대 관현악곡’으로 꼽힌다.
3. 크라이슬러 - 아름다운 로즈마린
자동차 회사가 아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프릿츠 크라이슬러를 말한다. 그렇다면 로즈마린은 누굴까? 묵묵부답하던 크라이슬러는 ‘허브꽃’이라는 아리송한 답변만을 내놓았다고 한다. 다만 이 곡의 유려함은 살랑살랑 바람에 휘날리는 봄꽃을 떠오르게 한다.
그 대상을 알 수 없어 더욱더 신비로운 이 곡은 섬세하고도 우아한 바이올린 선율을 간직했다. 작곡가 이상으로 바이올리니스트의 정체성이 강했던 크라이슬러는 뛰어난 테크닉과 독보적인 감정선을 겸비했다. 이 곡은 온 가족이 매일같이 듣는 CBS FM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의 시그널로 나와 더욱 친근하다.
4. 호프슈테터 - 세레나데
‘하이든=교향곡의 아버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주입식 교육의 힘. 듣자마자 귀에 익었는데 평소 흔히 듣는 휴대폰 통화 연결음이었다. 늘 듣는 소리다 보니 금세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익숙한 음악인데도 제목, 작곡가와 지독히도 매칭이 안 되었다. 마치 중학교 음악 시험처럼 반복 청취해서 암기를 시도했지만 사실 지금도 간혹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반전. 이 곡의 작곡자가 들어본 적도 없는 호프슈테터라는 사람인 것. 수도원의 신부였던 그가 작곡한 이 곡이 하이든의 현악사중주로 출판되어 버렸다. 일종의 해적판인 셈인데 명맥이 이어져 한국 휴대폰의 통화 연결음으로까지 전해졌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면 제목의 하이든을 호프슈테터로 수정해야 될까? 이것 참 난감하다.
5. 그리그 -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작품번호 16-1악장
예전 SBS 예능 프로그램 <솔로몬의 선택>에도 사용된 파괴력 넘치는 도입부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의 위대함은 도입부의 임팩트만큼 절륜한 연주를 장장 12분이 넘어가도록 끌고 간다는 점. 그리그 특유의 섬세한 필치가 빛나는 이 곡은 1868년, 그리그가 스물다섯일 때 만들었다. 단연 피아노가 주인공이지만 감초 같은 호른 사운드와 플루트의 섬세한 연주도 주목해야 한다.
6. 루빈스타인- 멜로디 F장조
듣고 있으면 애상에 젖는다. 눈물 한 방울을 떨굴지도 모른다. 이 낭만적인 곡조의 주인공은 1829년에 태어난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안톤 루빈스타인. 차이코스프키의 스승이라고 한다. 이 곡 말고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 없지만 하나의 걸작만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에 충분하다.
파블로 카살스의 첼로 버전도 좋지만 역시 피아주 연주에서 곡의 진가가 나온다.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Balazs Szokolay의 버전도 꽤 좋으니 감성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명곡을 놓치지 마시길.
7. 졸탄 코다이 – 첼로 소나타 Op.8
요즘 첼로 소리에 푹 빠졌다. 연주 이전에 악기 고유의 소리만으로 쾌감을 받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첼로가 그 케이스다. 바이올린의 하이톤에 대비되는 쩔꺽쩔꺽대는 소리는 세월을 탄 중년 남성을 닮았다.
씹는 식감이 좋은 어떤 어류의 이름을 닮은 헝가리 작곡가 졸탄 코다이. 고국의 민족성을 음악에 녹여낸다는 ‘국민악파’ 작곡가인 그는 관현악, 실내악, 춤곡 등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남겼다. 프랑스의 첼로 연주자 엠마누엘 불랑제의 기량을 만끽할 수 있는 무반주 첼로 소나타 8번은 서서히 옥죄어가는 듯한 첼로 선율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조금은 공격적인 느낌마저 드는 곳.
8. 프레데리크 쇼팽 – 녹턴 나장조 작품번호 9-3
홀로 어두운 방에서 차분히 하루를 마무리할 때 쇼팽만 한 친구가 있을까 싶다. 쇼팽의 녹턴(야상곡)이야 너무 유명해서 수많은 버전이 있지만 최근 꽂힌 건 칠레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버전이다. 필립스 사에서 Les 21 Nocturnes라는 이름으로 나온 앨범인데 1977~78년에 녹음되었으니 당시 아라우는 칠십 대를 훌쩍 넘은 노인이었다. 허나 리코딩 상태나 매우 훌륭하고 아라우의 터치가 무척 섬세하다. 아라우의 야상곡과 함께 편안하게 잠들거나 차 한잔하며 릴랙스해보면 어떨까? 앨범의 21개의 Piece가 모두 좋지만, 멜론에 ‘좋아요’ 표시를 남겨둔 건 나장조 작품번호 9-3이다.
9. 에릭 사티 - 짐노페디
에릭 사티의 음악은 들을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어찌 이렇게 우아하면서도 한편으론 모던한 것인가. 그가 고흐처럼 생전에 큰 주목을 못 받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심지어 음악 재능이 없다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사티는 후기 인상주의/상징주의 화가 수잔 발랑동과 사귀기도 했는데 그녀의 그림도 매력적이니 감상해보시길. 그녀는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어머니기도 하다.
사티의 친구였던 파트리스 콩타민 드 라투르의 시 <오래된 것들>에서 영향을 받아 작곡한 ‘짐노페디’는 호수에 이는 잔잔한 파문처럼 부드럽고 그윽한 선율로 가득하다. ‘평안’ 이란 말이 사티의 음악에 참 잘 어울린다. ‘Je Te Veux(나는 너를 원해)’와 ‘여섯 개의 그노시엔느’도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 이런 그가 ‘나는 완전히 혼자다. 고아처럼 혹은 고독한 벌레처럼’ 이란 말을 남겼다고 하니 아이러니. 아마도 생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해 좌절감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9. 올리비에 메시앙 - <아라위, 사랑과 죽음의 노래> 중 Doundou tchil
몇 개월 전 동네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문화평론가 김갑수 씨가 쓴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라는 책을 샀다. 음악과 사랑에 대한 애정을 표한 책이었는데 특히 오디오를 향한 광적인 집념을 엿보았다. 그가 책의 초엽에서 언급한 올리비에 메시앙. 1908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난 메시앙은 1920년대 주류였던 신고전주의의 추상성을 배격하고 ‘인간성’ 이 살아 숨 쉬는 음악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가 1944년에 출판한 <나의 음악어법>은 현대 작곡계의 큰 영향을 주었다.
올리비에 메시앙의 <아라위, 사랑과 죽음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마치 피에르 불레즈나 스티브 라이히를 처음 접했던 순간과 비슷했다. 서늘한 피아노 연주 위로 흐르는 영국의 소프라노 도로시 도로우의 음성은 차갑게 섬뜩했다. 특히 4번 트랙 ‘Doundou Tchil’은 영문 모를 ‘둔두 칠’이라는 의성어 혹은 의태어 스러운 언어가 머리를 두드린다. 올리비에 메시앙, 한 번쯤은 음악 세계를 쭉 파고들어 가고픈 작곡가다.
10. 필립 글래스 - Morning passages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음악 작곡가인 필립 글래스. 미니멀리즘의 권위자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미니멀리즘 이외에도 관현악곡과 협주곡, 실내악 등 다양한 형식에서 드러난 스타일이 방대하다. 사실 필립 글래스를 소위 말하는 클래식 음악의 범주에 넣어도 되는 건지 고민했지만, 대중음악과 대비되는 현대 음악의 개념으로 포함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감상한 버나드 로즈의 <캔디맨>의 서늘한 곡조가 그의 몫이고 에롤 모리스의 걸작 다큐멘터리 <가늘고 푸른 선>에서도 선율을 제공하는 등 그는 영화음악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필립 글래스는 우리 시대의 모차르트다. 그의 세계는 늘 비슷한 듯 다르고, 계속 반복하면서 끝없이 발전하는, 중독과 최면의 메커니즘에 의해 저절로 증식하는 거대한 숲이다.” 자신의 영화 <스토커> 음악을 작업한 글래스에게 바친 박찬욱 감독의 찬사다.
11. 글린카 - Ruslan and Lyudmila Overture
이 곡도 아마 CBS FM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에서 접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구스타프 홀스트의 <행성 모음곡>을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행성 모음곡>이 좀 더 비장하긴 하지만.
러시아의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는 ‘각국의 개성을 드러내자!’라고 주장하는 국민악파의 창시자다. 관현악과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남겼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건 <차르의 삶>과 <루슬란과 류드밀라>같은 오페라 곡. 내가 꽂힌 곡은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서곡으로 멋들어진 비행체 혹은 전설에 나오는 거대한 새가 하늘을 씽씽 나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스타워즈>, <슈퍼맨>의 영화음악으로 저명한 영화음악가이자 클래식 작곡가 존 윌리엄스가 이 곡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