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회
박수근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그의 그림 빨래터(1959)가 2007년 서울옥션에서 약 45억 2천만 원에 팔린 사건이었다. 당시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드문드문 그의 작품을 본 기억이 있지만, 단독 개인전은 처음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진행 중인 <박수근: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회다. 청년기부터 삶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네 가지 섹션으로 작품 세계를 망라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 박수근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작가였다. 도비니, 뒤프레 등과 함께 프랑스 퐁텐블로의 풍경을 그렸던 바르비종파의 밀레. 미용실 벽면에서 한 번쯤 보았을 <만종>이나 <이삭 줍는 여인들>이 익숙하지만 나는 그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최근 다녀온 DDP의 달리 특별전에서 <만종>이 달리에게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여 밀레를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박수근의 화풍은 ‘한국적’인 것으로 유명하나 앞서 밀레의 예 뿐 아니라 인상주의를 비롯해 고흐, 피카소 등 19세기 서양 회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수근이 직접 모은 서양 회화의 화집을 본 전시회에서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섹션부턴 박수근 특유의 작풍이 드러났다. 빨래하는 아낙네의 뒷모습, 어린 동생을 업은 소녀, 시장에 모여 앉아 수다 떠는 노인들, 피리와 북을 손에 들고 연주하는 ‘농악’의 장면까지. 화강암처럼 거친 화폭 아래 한국의 모습을 표현했다. 얼핏 보면 단순함의 미학처럼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필치와 색가, 안정감 있는 구도에 감탄했다.
비교적 외곽선이 뚜렷한 것들도 있지만 그의 작품은 경계가 모호해서 자세히 살펴봐야 진가가 나온다. 잎사귀가 떨어진 마른 나무의 그림은 잘 보면 분홍색 꽃잎을 품고 있고 창신동 초가 그림은 수없이 그어진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디테일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이 해외 수집가들에게 인기 있었던 점도 의미심장하다. ‘동양적인 무언가’에 환호하는 모습은 소설, 회화와 영화에 수 세기 걸쳐 이뤄져 왔고 그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있다. 박수근에게는 작품의 판매가 가족의 건사와 지속적 작품 활동에 도움을 줬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가 박 화백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펴낸 데뷔 소설 <나목>. 전시회 한 벽면에 적힌 <나목>의 한 구절이 가슴에 남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가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엔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박수근은 ‘보통 사람들’을 그렸다. 20세기 초중반의 힘겨운 시기를 견딘 이들이지만 슬픔에 젖어있기보다는 왠지 모를 희망을 드리운다. ‘봄을 향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간 이들은 괴로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