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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동교 Jun 06. 2022

<영화 유산, 공유와 전달> 2편

서울아트시네마 개관 20주년 기념 영화제에서 몇 작품을 감상하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삶의 설계>를 시종일관 넋 잃고 봤다. 루비치의 영화를 볼 때마다 연출력에 감탄하는데 이 영화도 1930년대 흑백영화의 고전미를 보여줬다. 극작가 톰(프레데릭 마치)과 화가 조지(게리 쿠퍼), 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광고 디자이너 길다(미리암 홉킨스)에 관한 이야기다. 섹슈얼한 관계가 암시된 세 사람의 공동체 생활, 여과 없는 성적 유머 등 시대 감안 진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삶의 설계(1933)


90년 전 영화인데도 여성 캐릭터가 압도적이다. 톰과 조지와 함께 꿈을 향해 전진하던 길다는 잠시 삶의 안전 보증수표와 같은 맥스에 의탁하지만 이내 맥스를 떠나 새로운 삶에 도전한다. 남자들을 휘어잡으며 주체적 선택을 이어가는 길다는 당대의 억눌린 여성 서사에서 비켜 나와 통쾌함을 안겨준다. 영국 극작가 노엘 코워드의 원작 희곡도 궁금해졌다.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중단편 세 편을 묶어 감상했다. <한 가지 문제, 두 가지 해법>(1975)과 <스승에 대한 감사>(1977) 그리고 <첫 번째 경우, 두 번째 경우>(1979).그는 도덕과 윤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다수 발표했는데 형식은 단순하지만 곱씹게 하는 힘이 있다.


<첫 번째 경우, 두 번째 경우>(1979)


수업 시간에 책상을 탁탁 치며 소음을 낸 아이들은 벌로 일주일간 교실 문밖에 서 있게 된다. 며칠 후 한 아이가 소리 낸 친구를 고자질한다. 이 대목의 영상을 교육 전문가와 교육부 장관, 정치인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묻는다. 대부분 고자질한 아이의 행동과 선생님의 훈육/체벌 방식을 비판했고 끝까지 함구한 채 단합한 아이들을 지지했다. 과연 나라면 어떤 이들을 지지할까, 혹은 내가 밖으로 불려 나간 학생 중 한 명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조셉 폰 스턴버그의 1934년 작 <진홍의 여왕>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예카테리나 2세에 관한 이야기고 러시아 왕자에게 시집간 소피를 마를렌 디트리히가 연기한다. 천사같이 착했던 소피가 왕가의 억압과 부조리로 악성을 쌓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화면을 꽉 채운 클로즈업이나 기괴한 표정 혹은 몸짓, 러시아 황실의 세트 디자인 등 독일 표현주의적인 화법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진홍의 여왕(1934)


독보적 개성의 배경엔 프리 코드 할리우드(Pre-code Hollywood)가 있다. 미국 영화계의 심의 규정이 본격화되기 전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을 말하며 이때의 영화는 표현이 자유로웠다. 미국 영화 검열 제도인 ‘헤이스 코드(Hays Code)’가 1930년 제정되었으나 1934년까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딱 1934년에 개봉한 <진홍의 여왕>은 과도기의 마지막 순간을 잘 활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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