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를 감상하다.
체코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본 안토닌 드보르작의 <루살카> 이후로 약 2개월 만에 오페라 작품을 보게 되었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I Vespri Siciliani)는 <라 트라비아타>와 <리골레토>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가 1855년 초연한 오페라 작품. 프랑스 군대의 억압에 맞선 시칠리아 시민을 다뤘다.
의상과 무대 세트 등 파비오 체 사레의 연출은 모던했다. 프랑스=블루 / 시칠리아=오렌지로 의상과 손에 든 공의 색상을 일치시켜 대립 구도를 명확하게 했다. 행성계를 묘사한 세트 디자인과 태초의 에덴동산을 표현한 듯한 백색의 자연은 전위적이었다.
엘레나(김성은)가 사랑의 기쁨으로 노래하는 장면, 그리스 가면을 쓰고 즐겁게 춤 추던 시칠리아인들이 살해되는 장면이 강렬했다. 몽포르테(한명원)가 섬 모양의 조형물에 왕관을 두며 시칠리아 지배를 암시한 부분과 아리고의 어머니와 엘레나의 어머니 같은 망자(亡者)에 검은 가면을 씌워 유령처럼 묘사한 지점이 탁월했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는 결국 관계와 감정에 관한 작품이다. 프랑스인의 압제로 오빠를 잃은 엘레나와 그녀를 향한 사랑, 시칠리아의 자주권을 위해 봉기의 선봉장이 되려는 아리고(국윤종), 하지만 자신이 프랑스 총독 몽포르테의 아들임을 알게 되는 아리고. 아들에겐 자상하지만, 시칠리아엔 냉혹한 몽포르테와 혁명 지도자 프로치다(김대영)까지. 이뤄질 수 없는 엘레나와 아리고의 사랑, 끈적한 피로 맺어진 아리고와 몽포르테.
프로치다는 특히 아리송하다. 그의 실행력과 의지는 봉기의 주요 동력이 되지만 때론 ‘대학살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져 섬뜩하기도 하다. 독보적 울림의 베이스 김대영은 프로치다의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네 사람의 감정을 더 들어보지 못한 채 학살을 알리는 종이 울리며 극은 끝난다. 어쩌면 그게 베르디의 의도였을까? 학살에 이르기까지 쌓인 화합과 갈등, 선과 악의 이분법이 설명 못하는 감정의 결은 급작스러운 결말에 짙은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