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천방지축, 하지만 안 갔으면 후회했을겨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로 직행하느냐 아니면 아헨을 여행하느냐. 귀국행 비행기는 7시 출발이어서 5시 반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아헨에서 프랑크푸르트는 기차로 약 2시간, 버스로 3시간 반 거리. 그렇다면 아침 일찍 발켄부르크에서 출발해도 아헨에서 주어진 시간은 3시간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아헨 여행을 결정했다. 아헨 대성당은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Hotel Lahaye의 친절한 주인장의 배려로 30분 일찍 조식을 먹을 수 있었다. 4박 5일 머물렀던 호텔을 떠나 보슬비 내리는 발켄부르크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40분 걸려 아헨 중앙역(Aachen Hauptbahnhof)에 도착했다.
첫 번째 행선지는 엘리제원천(Elisenbrunnen). 아헨의 도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과거 로마인들이 거대한 온천장을 세운 곳이다. 견학하러 온 초등학생들은 온천수를 맛보자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한 모금 했는데 실로 기묘한 맛이었다.
Eurogress 라는 일종의 컨벤션 센터에 들렀다. 콘서트와 각종 문화 관련 이벤트를 여는 곳인데 건물 자체보다 분수가 딸린 정원이 더 멋졌다. 손에 과즙을 줄줄 흘리며 빨간 사과를 베어먹었다. 유럽 여행할 때 사과를 많이 찾게 된다. 한 개를 다 먹으면 은근히 배가 불러오고 간식으로 먹어도 좋다. 종류도 다양해서 고르는 재미도 있고.
방학인지 몰라도 엘리제원천에 이어 시청(Aachen Rathaus) 주변에도 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건물 구경은 뒷전인 채 서로 장난치기 바쁜 아이들, 내용은 좀 다르지만, 카니발의 노래 ‘그땐 그랬지’가 떠올랐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14세기에 고딕 스타일로 지어진 유서 깊은 이 건물은 멀리서 봐도 입이 떡 벌어진다. 다가갈수록 선명해지는 건물의 디테일도 압권이다.
앙증맞은 대성당 미니어처가 ‘본편을 예고하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샤를마뉴 대제가 세운 아헨 대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성당이라고 한다. 안에 들어가면 동굴같이 어둡고 대규모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그려진 황금빛 천장을 목이 빠져라 바라본다. 고풍스러운 대리석의 내부를 정교한 무늬들이 장식하고 있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엘리제원천과 시청, 대성당 등 랜드마크는 다 봤다. 맘 가는 대로 구석구석 구시가지를 걷거나 구글맵에 저장해두었던 레코드 숍을 가거나. ‘이번 여행의 테마는 나름 레코드 숍 투어 아니냐?’라는 합리화로 동명의 영화(한국어 제목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가 떠오르는 High Fidelity라는 가게에 들어섰다.
탐 웨이츠와 젠틀 자이언트 같은 익숙한 이름부터 독일 뮤지션 우도 린덴버그, 1970년대 말부터 활약했던 스위스 출신 전자음악 밴드 옐로(Yello) 등 다양한 앨범 커버가 반겨주었다. 촉박한 시간에 반해 흥미로운 앨범이 너무 많았고 특히 Rheingold, Spliff 등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독일식 뉴웨이브+펑크인 노이에 도이췌 벨레(Neue Deutsche Welle) 앨범들이 눈을 번뜩이게 하였다. 14세기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대한 돌문 Ponttorr를 마지막으로 아헨 여행을 마쳤다.
여기까진 좋았으나… 한 가지 해프닝이 첨가되었다. 1시 반에 출발하기로 했던 플릭스버스가 도통 오지 않았다.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버스로 3시간 40분을 달려 5시쯤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 도착, 5시 반쯤 공항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7시 비행기니 애초에 시간을 너무 타이트하게 잡은 것도 있다...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자매 혹은 친구로 보이는 두 흑인 여자는 전화로 컴플레인 했으나 소용없었다. 플릭스버스가 원체 시간 약속 잘 안 지키는 건 알았지만 1시간이나 늦을 줄은 몰랐다.
다행히 기사가 메이크업 개념으로 더 빨리 달렸다. 물론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계속 구글맵으로 어디쯤 왔나 지켜봤다. 내리자마자 캐리어를 끌고 신나게 달려 원하는 시간에 공항행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시간과의 숨 막히는 싸움, 대성당과 하이 피델리티 때문에라도 안 갔으면 아쉬웠을 아헨. 끝까지 역동적인 다이내믹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