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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동교 Sep 19. 2022

나기사, 날카롭고 대담하여라.

서울아트시네마, <탄생 90주년 오시나 나기사 회고전>

오시마 나기사의 작품을 보면서 ‘이 사람은 천재구나’라고 생각했다. 정치를 소재로 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정치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현실과 비현실을 모호하게 비트는 연출 방식도 독특하다. <감각의 제국>로만 익숙한 이들에게 나기사의 다른 작품들을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도 갈 길이 멀지만 말이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진행한 <탄생 90주년 오시나 나기사 회고전>에서 본 네 편의 영화, 간단한 감상을 남겨본다.


1) 일본의 밤과 안개(1960)

결혼식에 모인 청년들이 열띤 논쟁을 이어간다. 비밀들과 숨겨진 이야기가 잦은 플래시백을 통해 밝혀지고 청년들은 감상에 빠지거나 ‘그때 왜 그랬냐?’며 격분하기도 한다. ‘60년대 안보 혁명’의 문맥을 잘 모르다 보니 감정이입은 어려웠으나 당시 일본 젊은이들의 가치투쟁을 짐작해본다. 로케이션의 변화나 역동적인 카메라워크 없이도 긴장감을 선사하는 이 영화는 언뜻 시드니 루멧의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43개의 롱테이크로 형식적 실험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2) 일본춘가고(1967)

성(性)과 욕망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나기사 스타일이 반영되었다. 이제 막 대학 시험을 친 세 청년은 ‘두 자매랑 자겠걸랑 언니부터 품거라 호이,호이!’ 라는 식의 기괴한 노래를 부르며 성적 판타지를 표출한다. 한창 혈기 왕성한 시기인 걸 알면서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시스템에 대한 반항 내지 냉소로 이해할 수 있다. 불쾌한 이 노래 말고도 영화 속 다양한 곡들이 각 집단의 성격을 대변하며 집단 간 대립을 암시하기도 한다. 군가와 포크송, 운동가요 각각이 내포하는 의미는 개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3)돌아온 술주정뱅이(1968)

 외딴 섬에 도착한 세 청년은 한국인으로 오인 받고 그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교차하는 활극이 시작된다. 심지어 중간에 ‘상영 오류인가?’라며 헷갈릴만큼 동일한 첫장면으로 영화가 ‘재시작’된다. 물론 상황을 조금씩 변주하며 ‘과연 무엇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가?’를 헛갈리게 한다. 두 민족의 대립적 측면을 강조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체성의 혼란까지 더해지며 미궁에 빠진다. 전위적 형식미가 극에 달한 영화.


4) 열정의 제국(1978)

이토코 나카무라의 동명 소설에 기반을 두어 상대적으로 전형적인 영화며 장르성도 눈에 띈다. 제목도 비슷하고 두 편 모두 후지 타츠야가 출연하다 보니 <감각의 제국>에 이어 ‘오시마 나기사의 야한 영화’로 인식되는 듯 하나 사실 선정성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영미권 스릴러와 귀신이 나오는 일본 민담을 섞은 듯한 연출과 빔 벤더스, 알렝 레네와 작업한 아나톨 도먼의 영향인지 전체적으로 세련된 미장센이다.


1970년대까지 일본 영화가 참 대단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단순히 상을 많이 받아서, 비평가들에게 인정받아서라기보다는 영화 매체의 본질을 꿰뚫는 진지한 문제작들이 많아서 그렇다. 오시마 나기사의 작품을 보면 때로 무언가 들킨 듯 가슴이 시큰해지지만, 예술가적 자의식에 감흥을 느낀다. 이런 일본 영화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과거의 작품을 파헤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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