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에릭 클랩튼 도쿄 부도칸 콘서트
근래 팬데믹 관련 실언으로 위신이 추락했으나 음악인 에릭 클랩튼의 업적은 태산(泰山)처럼 굳건하다. 존 메이올 앤 더 블루스브레이커스와 크림, 블라인드 페이스와 데릭 앤 더 도미노스 같은 슈퍼 밴드를 거쳐 간 초특급 기타리스트이자 블루스 록의 파이오니어이며 히트곡도 수없이 많다. 록과 대중음악의 신화와도 같은 이 인물을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2007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어쭙잖게 갔던 올림픽공원에서의 내한 콘서트로부터 약 16년이 흐른 올해 4월, 에릭 클랩튼의 도쿄 부도칸 콘서트를 봤다.
비틀스와 퀸, 레드 제플린 대중음악계 전설이 거쳐 간 부도칸은 ‘무도관(武道館)’이란 이름처럼 입구부터 내부까지 전통적이었다. 본래 1964년 동경 하계 올림픽 유도 경기를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음향도 최상은 아니었다. 거기에 나름 거액을 주고 구입한 S석도 남서쪽 꼭대기 한구석. 그나마 왼쪽엔 자리가 비어서 여유로웠다. 서양 사내가 내 자리 3분의 1쯤을 거대한 왼쪽 다리로 가리고 있었지만 금세 장모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과 자리를 바꿔 다행이었다.
음악이 열악한 조건들을 날려버렸다. 라이브 음반에만 수록된 ‘Blue Rainbow’로 문을 연 콘서트는 일렉트릭 기타 세트와 어쿠스틱 기타 세트의 교차, 즉흥 연주 스타일의 블루스 고전 커버와 히트곡의 교차, 부드러움(Wonderful Tonight)과 쾌활함(Cross Road blues)의 교차 등 교차미학을 설파했다. 조 카커, 브라이언 페리와 협업했던 베테랑 건반주자 크리스 스테인턴과 작곡가 겸 드러머 도일 브램홀의 아들인 기타리스트 도일 브램홀 2세 등 밴드 구성원들의 연주력도 대단했다.
개인적 선호도 아래 클랩튼의 경력 중 하나만 꼽으라면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와 함께한 역대 최고 락 트리오 크림이다. 중학교 시절 1967년 작 <Disraeli Gears>와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 ‘Strange Brew’와 ‘Sunshine Of Your Love’, ‘World Of Pain’의 3연타를 말이다. 부도칸에서 ‘Badge’와 ‘Cross Road Blues’(로버트 존슨 원곡)같은 크림 시절 곡을 들어 행복했다. ‘Badge’의 “들었다 놨다” 숨죽이게 하는 곡 구성이란.
일본과 한국에서 묶어서 거론되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 그리고 에릭 클랩튼 모두 블루스를 계승했다. 그 중에서도 블루스맨 성향이 가장 도드라지는 인물이 클랩튼이다. 퓨전 재즈와 전자 음악을 시도한 제프 벡과 레드 제플린의 함장으로 하드 락 기반의 다채로운 장르를 탐색한 페이지에 비하면 클랩튼의 음악적 성향은 비교적 일관적이었다. ‘Key To The Highway’(찰리 시거 원곡), ‘I’m A Hoochie Coochie Man’(윌리 딕슨 원곡) ‘Call Me The Breeze’(제이 제이 케일 원곡) 이날 선곡도 블루스 커버가 많았다. 영국 민요 ‘Sam Hall’ 커버는 좀 이질적이긴 했다.
대표곡 ‘Tears In Heaven’은 좋은 곡이지만 그간 큰 감흥은 없었다. 이날은 아들을 잃고 곡을 쓴 그 마음에 잠시나마 감정이입 되며 찡해졌다. ‘Wonderful Tonight’도 그랬다. 수많은 그루피와 난잡한 삶을 산 클랩튼이겠지만 한 여성을 향한 이런 로맨틱한 면도 있구나, 낭만적이었다.
전날 셋리스트를 보고 큰 기대를 안 했던 앙코르 ‘High Time We Went’가 의외로 강렬했다. 좀 부끄러운 맘도 있다. 꽤 즐겨 들었던 <Nightbird>(1980), <One Good Reason>(1987)의 주인공 폴 캐락을 몰라본 것이다. 이번 일본 투어에 키보디스트 겸 백업 보컬로 참가한 그는 블루 아이드 소울 선배 조 카커의 ‘High Time We Went’에서 직접 노래했다. 영국 월간지 레코드 컬렉터(Record Collector)는 “만약 보컬 재능이 상업적 성공과 비례한다면 폴 캐락은 필 콜린스나 엘튼 존 같은 전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을 것이다”라고 평했을 정도다.
2007년 내한의 셋리스트가 덜 대중적인 곡들로 채워졌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부도칸 공연과 비교하니 그렇지도 않았다. 내한 때 ‘Tears In Heaven’ 을 안 불렀지만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Little Wing’ 커버와 데릭 앤 더 도미노스의 ‘Got To Get Better In A Little While’과 ‘Why Does Love Got To Be So Sad?’ 그리고 저 유명한 ‘Layla’를 들려줬다. 이번 투어에서도 4월 19일엔 ‘Layla’를 들려줬다니 그날 간 사람들은 복 받은 셈이다.
앙코르 전 이날 공연의 마지막은 제이 제이 케일의 곡을 커버한, 이제는 에릭 클랩튼의 곡으로 더 명성이 높은 듯한 ‘Cocaine’이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없는 기타 리프와 후렴구. 2007년 내한 때 무슨 단어인지도 모르고 코캐인 코캐인을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 가장 선명했던 곡도 자연스레 ‘Cocaine’이었다. 16년이 지나 이 곡을 다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솔로 1집 <Eric Clapton>(1970)의 ‘After midnight’과 ‘Blues Power’, ‘Let It Rain’, 크림의 ‘White Room’과 ‘Strange Brew’, 블라인드 페이스의 ‘Can’t Find My Way Home’, ‘Presence Of The Lord’를 라이브로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78세의 기타 거장은 아직 5년은 거뜬해 보였다. 그가 다시금 내한하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