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동교 Feb 02. 2024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2023)

작년 크리스마스날 아트나인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을 본지 한 달 만에 다시금 사카모토 류이치의 영화를 만났다. 소라 네온(Sora Neon)이 연출한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2023)를 CGV여의도에서 감상했다. 스무 명가량의 관객은 고요한 정적 속에서 흑백의 사카모토와 만났다.


야마하 피아노 앞에 앉은 사카모토는 경력을 관류하는 스무 작품을 차분하고도 경건하게 연주한다. 영화는 뒷모습을 서서히 줌인하며 뒷모습을 보여준다. 은빛 머리칼이 멋들어지지만 곧이어 드러나는 얼굴은 앙상한 나무처럼 수척하다. 잠시 쉬는 시간에 “애 쓰고 있어요”라며 말하는 대목과 연주가 성에 안 차는듯 자꾸 손을 푸는 장면도 있지만 묵언수행하는 구도자처럼 스무 곡을 완주했다.



셋리스트는 주로 1990년대 이후 발표한 현대적 고전 음악(Contemporay Classical Music)이 주를 이룬다. 각각 <Playing the Piano 12122020>과 <Playing The Orchestra 2013>에 수록된 ‘aubade 2020’과 ‘ichimei’같은 클래시컬 뮤직이 낯설지만,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ellow Magic Orchestra) 시절의 신스팝 명곡 ‘Tong Poo’와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처럼 유명한 곡도 피아노 독주로 편곡했다. 앞의 두 곡을 비롯, 베르나르토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 사랑>(1990)에 실린 ‘The Sheltering Sky’와 <마지막 황제>(1988)의 타이틀 넘버 ‘The Last Emperor’등 대부분의 트랙이 1996년 실내악 음반 <1996>에 들어가 있다.


“이 날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는 ‘The Wuthering Heights’도 <1996> 수록곡이다. 피터 코스민스키(Peter Kosminski) 감독의 1992년 영화 <폭풍의 언덕>에 나온 이 노래는 멋진 선율과 극적인 전개를 두루 갖췄다. 이내 줄리엣 비노쉬와 랄프 파인즈가 나온 영화도 궁금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잠깐 여의도 한강공원을 걸으며 이 곡을 다시 들었다. 유람선이 떠 있는 강물을 바라보며.


연주 내내 퍼커션 혹은 리듬 트랙이라고 보기 어려우나 무언가 “두둠칫”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피아노 페달에서 나온 부산물로 예상되는 이 소리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긴장감을 조성했다. 공연 중반부 그랜드 피아노 음향판에 금속 장치를 대 기묘한 소리 효과를 자아내기도 했다. 마치 피아노에 고무와 금속을 사용했던 존 케이지(John Cage)나 펠트천을 얹었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처럼 전위적인 면모였다.



그러고 보면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와 영국 뉴웨이브 밴드 재팬(Japan)의 데이비드 실비언(David Sylvian)과 토마스 돌비(Thomas Dolby), 빌 라스월(Bill Laswell)과 협업한 솔로 시절은 신시사이저의 마력을 한껏 드러냈다. 이 시기 사카모토는 화려한 분장과 의상 그리고 거대한 음향 장치에 둘러쌓여 있었다. 색색깔 부가 요소를 걷어낸 채 피아노 앞에 앉은 은발 노인은 외려 본인의 이상향과도 같았던 드뷔시와 바흐에 근접해보였다. 현대성과 동양의 미를 갖춘 자신만의 형태로.


음악에 초점을 맞췄지만 촬영도 담백하고 우아했다. 주름진 손의 클로즈업과 피아노 한켠에 비친 얼굴, 엉덩이를 반쯤 걸친 가죽 의자는 일흔 해 묵은 노구(老軀)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을 머금은 악기와의 대화같았다. 연주 마치고 손을 사뿐하게 들어올리는 모습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Heroes(1977) 앨범 이미지가 연상되었고, 사카모토의 육신이 부재한 자리 마치 유령이 건반을 두드리는듯한 라스트 씬도 긴 여운을 남겼다.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사카모토의 공연을 본 적도, 앞으로 그럴 기회도 없겠지만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스크린이란 물리적  거리 지우고 사카모토의 현신 혹은 실재(實在)로 나에게 와닿았다. 영화와 공연의 문을 닫는 라스트 트랙 ‘opus’는 1999년 모던 클래시컬 앨범 <BTTB> 수록곡이다. 라틴어로 “작품”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주로 클래시컬 뮤직의 작곡가들이 사용한다. 그래서 이 작품번호 Op.(오퍼스)는 사카모토의 음악 생애에 대한 끝맺음 표시처럼 보인다. 우리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으로 위대한 예술가의 마지막 뒷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https://www.youtube.com/watch?v=-S_mHCkxBWw

작가의 이전글 멜라니 사프카(1947 - 202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