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약한 우주 먼지의 질문
아미는 슬펐다.모든 것이 슬펐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삶이라는 것 자체가 슬펐다. 아마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서울로 이사 온 이후부터인 것 같다.전도서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헛되고 헛되도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헛되도다.'언제부터인가 이 구절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는 다녔지만 교회에서는 이 전도서를 가지고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것은 듣지 못했다. 우연히 아버지 서재에서 성경을 꺼내서 보다가 펼쳐진 곳이 이 구절이었다.이 구절은 어쩐지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 구절과 더불어 파스칼의 팡세에서 읽은 구절. '한 방울의 물방울로 인간을 죽이기에 충분하다'는 말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아미는 그 구절을 읽고 충격에 빠진 기억이 명료하게 난다."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부수는 데는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아미는 '한 방울의 물이면 인간을 죽이는 데 충분하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이후로 그 구절만 계속 떠올랐다.
그런 생각에 잠기면서 우주가 떠올랐다.아! 그렇구나. 또 이렇게 됐네. 이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배가 아프다.정확하게 배가 아닌지도 모른다. 가슴과 배 어딘지 아니면 전체가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눌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아프다. 실지로 아프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아픔이다.이럴 때 아미가 하는 것은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빨리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이대로 가면 어딘가로 빠질 것 같다.빠져서는 안 돼.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아! 저기 창밖에 서 있는 나무, 저 나무 옆에 사람이 걸어오네. 왜 사람이 저기 있을까? 아! 저기 문이 하나 있구나! 전에는 못 봤는데 나뭇잎이 다 떨어져서 보이는구나!’ 생각을 억지로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이 외부 세계로 향하게 되면 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해진다.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신체적 아픔인지 현상인지 모르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건 주로 조용히 혼자 있을 때나 밤에 문득 깨어 잠이 오지 않을 때 찾아온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무한'이라는 괴물이다.그건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나. 우주에 대해서 배웠다. 무한한 우주 공간 그리고 무한한 우주의 시간, 그 무한함이 감지할 수 없고 잡히지 않기에 무서운 모양이다. 그 개념은 가슴속에서 소화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자라서 괴물이 된 것 같다. 우주만 생각하면 그 괴물이 나타난다. 가슴에 커다란 동공 같은 것을 파면서 속 창자에서 가슴으로 퍼지면서 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공허하게 비는 것 같기도 하면서 가슴이 허해지면서 동시에 압박한다. 배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아픈 것 같기도 하다.
무한한 공간과 무한히 흐르는 시간, 아무 이야기도 없이 무한의 침묵으로 흐르는 우주에서 지구도 티끌이고 그 티끌 속에 붙어 사는 자신은 티끌도 안 되지 않는가? 자신이 지금 태어나서 살아갈 시간은 반딧불이에 대비해 본다. 한 번의 반짝임도 채 못 되는 찰라일 것이지 않은가? 지구의 시간 또한 그렇지 않은가?그런데 아빠는 왜 이렇게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후변화 문제에 자신을 얽어매고 고생을 하시는 걸까?
수학 문제집에 빨간 형광펜으로 표시한 문제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숫자들은 달아나기 바빴다.문득 최근에 자주 꾸는 꿈이 떠올랐다.꿈속에서 아미는 어떤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바닥이 어딘지 찾아보려고 하는데 우물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 바닥은 오히려 뚫려 있어서 검은 우주로 연결되어 있다. 떨어지면 우주의 무한한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 우물 속으로 빠질 것 같아 무서우면서도 아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바닥이 어딘가 있기를 찾는다. 무서워 떠나려 하나 떠나지도 못하고 계속 시꺼먼 우물 속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한다.
생각을 떨쳐버리고 다시 빨간 형광펜의 라인을 따라간다.수학 선생님은 쪽집게 선생님으로 소문이 나있다. 수학선생님이 찍은 문제들은 십중팔구 시험에 나온다. 이것만 잘 해 놓으면 어느 정도는 준비가 다 된다.방정식을 풀고자 하는데 다른 생각이 또 끼어들었다. '아빠가 오늘 저녁엔 들어오실까? 나 수능 날에는 오시겠지? 어쩌면 안 오실 수도...'하고 생각하자 하늘이 내려앉는 듯하다. 아침에 엄마가 아빠에게 한 소리는 무슨 뜻일까? 그럼, 나 졸업식에는? 아빠가 응원해 주지 않는 수능고사 날과 아빠 없는 졸업식 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한다. 처음으로 아빠 없는 세상의 가능성이 머리에 떠오른다. 상상할 수 없다. 아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아빠는 이번에는 언제나 돌아오실까. 내일이라도 오셔서 장농 위의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고 '트로이메라이' 한번 연주해 주면 내가 용서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아미의 아주 어렸을 때 처음 기억엔 아빠가 바이올린으로 노래를 가르쳐 주던 장면이 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아빠는 어깨에 하얀 수건을 얹고 바이올린을 올려놓곤 했다. 걸음마도 떼기 전, 벽에 기대어 서서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아빠에게 노래를 배우던 기억이 났다. 아빠의 호탕한 웃음과 바이올린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배우던 기억은 언제나 그녀를 따라다니는 고향 같은 기억이다. 그 장면이 재생되기를 요즘 특히 아미는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의 낡은 바이올린이 장농 위에 먼지를 덮고 안 내려온 지 수년은 된 것 같다. 아빠는 왜 바이올린 연주를 멈추셨을까. 트로이메라이를 켜실 때의 아빠의 멋진 모습의 아빠 그리고 우리에게 바이올린 반주로 노래를 가르쳐주실 때의 한바탕 웃으시던 그 행복하시던 아빠가 왜 바이올린을 그만두시기로 결심하시고 장농 위로 올려 놓으셨는지. 그 바이올린이 눈에는 안 보이지만 장농 높이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것을 아미는 마음의 눈으로 매일 본다. 그리고 상상한다. 그 바이올린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아빠의 흰 손수건을 댄 왼쪽 어깨에 올려질것을. 어렸을 때는 아빠가 연주하시던 곡이 무슨 곡인지 몰랐다. 그러나 후에 티비에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의 연주가 나올 때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호로비츠의 감동적인 사연과 연주보다도 아빠의 바이올린 연주가 더 좋다. 이 세상의 어느 악기보다도 아빠의 바이올린이 가장 아미의 마음을 울린다. 아빠는 이 세상에서 트로이메라이를 가장 잘 연주하는 연주자이다. 그런데 문득 이제는 그 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미는 어느새 문제집을 보는 것이 아니고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서관 창밖은 여전히 스산하다. 아까보다 더 센 바람이 낙엽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다 이 구석에 한 가득, 저 구석에 한 가득 쌓아놓았다가 가끔 휘몰아쳐 불러내기를 반복했다.아미는 자신이 저 바람에 쓸려 여기로 저기로 끌려다니는 낙엽 같다고 느꼈다.해가 짧아져서인지 어느덧 석양빛이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도서관 책장을 비추자 도서관 안의 공기 중에 떠다니던 수많은 먼지가 그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특정한 각도의 빛에 의해 그 존재를 드러냈다.'우주라는 무한 공간에서는 나는 저 먼지보다도 미약하겠지..'
무한한 시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지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깊은 산속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져도 아무도 보지 않은 채 지는 것처럼, 애써 성공을 이루고 산다 해도 모래성이 파도에 쓸려나가듯 덧없는 일이 아닐까. 우주는, 지구는, 인간의 희로애락과 무관하게 그저 자신의 순환을 계속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피어나는 야생화,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쌓는 모래성. 그것은 헛된 일일 텐데. 왜 산속의 야생화는 자랑하듯 아름답게 피고 사람들은 정성을 다하여 모래성을 지을까?전도서의 그 구절이 다시 가슴을 파고들었다.
'시험이 내일 모레인데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아미!'아미는 머리를 털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더 이상의 시간 허비는 안 돼' 하고 자신에게 말하고 화장실로 갔다. 세수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빨리 공부에 집중해야 해' 하는 목소리가 뒤통수 쪽에서 울렸다.
[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