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썹과 눈썹 사이 (4회)

by Eunyoung Kim


땅에 떨어진 한권


화장실 싱크대에서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 나니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자리로 돌아가는 길, 사선으로 나란히 서 있는 높은 책장들 사이를 걸었다. 양쪽 선반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들이 분주히 눈에 들어왔다. 역사 섹션인 모양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화와 철학책들이 빽빽히 꽂혀 있다.길쭉하고 좁은 네모의 겹겹이 꽂힌 책은 마치 저마다의 세상을 담은 상자 같다. 그리스 신화가 수십 권이고 다음은 로마 신화가 수십 권으로 나오면서 호메로스의 율리시즈와 일리아드가 수십 권의 다른 버전으로 빼곡하게 꽂혀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편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시대의 철학자들의 이름들이다. 그 세상은 책이라는 형태로 아미의 손 속에 들어온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

오래된 책 냄새가 코끝에 스민다. 오래된 책 냄새는 언제나 향기롭다. 그 냄새는 아미를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 편안하고 평화롭고 시간과 공간을 잊어버리는 곳으로. 그리고 익숙하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잊어버렸던 고향을 찾은 것처럼.읽으려 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책들의 제목. 어느 것은 익숙하고 어느 것은 생소했다. 그 책들을 하나하나 다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서 책장에서 손에 닿는 대로 책 하나 꺼내서 그 책에 코를 박고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그곳으로 가고 싶다. 저 먼 나라로, 문명이 시작되던 페르시아로, 아니 그 너머 문자가 없던 시대로. 모닥불 곁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대로. 어쩐지 아미의 마음이 그곳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책은 그런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 텐데' 하고.슬픈 마음으로 수요일의 기말시험을 떠올렸다. 수능시험도, 엄마 아빠 일도, 채령의 이상한 태도도... 다 잊고,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작은 네모난 책, 책갈피 속을 가득 채운 문자들이 데려다 주는 그 세상으로 가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이 그들의 시간이었던 느린 시간 속에서 사랑하고 질투하면서 사건 속에서 분주하게 다니는 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적어도 그 이야기를 적은 작가의 마음에 코를 쏙 들이밀고 들여다보고 싶었다.


갑자기 아미는 비틀하고 넘어질 뻔했다.발밑에 책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얼른 집어서 제목을 보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 책장에 있었던 책이다. 그때 읽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서 도로 꽂아 놓았던 책이다.책을 주워서 있었던 자리를 찾을 수 없다. 그 책이 빠져나온 자리가 어딘가 있을텐데 없다. 도서관에서 붙여 놓은 레이블의 번호를 보니 이 섹션에 속한 책이 아니다. 아마 사서가 운반하다가 떨어뜨렸는지도 몰라 일단 자리로 가지고 갔다.


책은 오래된 책 같은데 안에서 역시 헌책 냄새가 난다. 이번엔 좀 이해될까 하고 다시 책을 펼쳐보았다. 수염 기른 니체의 얼굴이 나오는 겉장을 지나 처음 몇 페이지를 읽는데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줄거리를 따라가기도 힘들고 자세한 설명도 없다.조금 더 지나서 여기저기를 펴서 읽어 보다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리 어디를 한 대 얻어맞은 것도 같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 우리는 끝없는 허무 속에서 헤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밤이 우리를 점점 궁지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아침에도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사토장이들이 신을 땅에 묻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직도 신이 부패해 가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 또한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엄마는 어떻게 받아들이실까?외할아버지가 목사인 엄마는 기도로 아침을 시작하고 기도로 저녁을 끝맺는다. 저녁 기도를 언젠가 아미가 들은 적이 있는데 집안의 어른들과 아빠 그리고 아미,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결혼한 동생들의 가족들 모두를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신다. 그중에는 반드시 아미가 들어있다. 아미의 공부와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우리 집안이 잘 되는 것은 모두 엄마 덕분이라고 가족들이 모이면 말한다. 큰 외삼촌은 목사님이시다. 그리고 이모 한 분은 목사 사모이다. 엄마를 비롯해 외가 쪽 가족의 삶에서 신은 절대적인데. 이 말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이 없다면 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미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한한 우주, 우주 속의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 그 점 속에서 점으로도 흔적이 없을 것 같은 자신, 자신의 존재는 무엇인가.


눈썹과 눈썹 사이

그러나 아미는 자신이 이미 깨어져 있음을 안다.데미안 때문이다. 천사도 악마도 아닌 양쪽을 다 가진 신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미는 절대적인 선의 신보다 천사와 악마를 같이 가진 신이 더 좋다. 자신을 더 잘 이해할 것 같아서다. 아미도 알을 깨고 아프락사스로 날아가고 싶다.그런데 니체는 신이 죽었다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아프락사스는 엄마와 삼촌들이 믿는 하느님보다는 인간을 더 잘 이해할 것 같아서이다.

아프락사스를 알고 난 다음부터 아미의 일기장에는 아프락사스에 대한 것으로 가득찰 때가 많았다. 아미는 일기를 쓸 때 먼저 '내가 나에게' 하고 쓴 다음에 그 밑줄부터 일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어쩐지 자신을 좀 더 들여다보기 쉬운 것 같다. 그 당시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 그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어땠는지 적을 거리를 찾아내기 쉽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자신이 그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가 분명해진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프락사스'에게 쓴다. 그러면 '내가 나에게' 할 때보다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지고 이것저것, 힘들고 어려운 것을 말하기가 쉬워지는 듯하다. 그렇게 하면 좀 마음이 편해진다.


니체의 "신이 죽었다"의 선언은 충격적이지만 이해할 수 있다. 니체가 거듭 말하는 '대지의 뜻을 들어라'라는 말은 우리가 사는 실질적인 현실에 근거한 생각을 하라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지금껏 인간의 역사는 '하늘에는 하느님이 있다'는 전제로 진행되어 왔다. 땅을 딛고 땅에서 사는 인간이 땅의 일은 무시하고 하늘만 보고 하늘의 일만 신경 쓰면서 산 건 아닐까?


아미는 다음 장을 넘겼다."위버멘쉬는 네 안에 숨은 자아다, 너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는 숨은 통치자이다."'위버멘쉬'라는 말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대지의 말을 들어라. 하늘이 아닌 땅의 삶을 사랑하라."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 무언가 쿵 하고 자신을 때리는 것 같다. 위버멘쉬는 대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신은 죽었고 세상은 허무하지만 긍정해야 한다고 한다. 내가 날아갈 아프락사스는 어디에 있고 위버멘쉬는 어디에 있는가?삶을 긍정해야 한다면 아빠가 없는 세상, 채령의 떠남, 세상은 내가 수능 고사에 대한 긴장감과 압박을 견딜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은 허무하고 허무한데 긍정해야 한다고? 부정할 것이 있어야 긍정할 것도 있지 않은가.아미에겐 아픔, 슬픔, 고통을 넘어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 니체가 세상이 허무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끙끙 앓고 있는 그 고민이 저 혼자인 줄 알았는데…


아미는 가슴이 답답했다. 깊은 공허가 가슴에 가득 차는 것 같다.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얹고 책에 엎드렸다.눈 앞이 가물가물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아미는 짙은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위버멘쉬, 내 속의 자아? 나의 통치자? 그럼 위버멘쉬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날 구할 수 있다면.


점점 낮아지는 태양은 사선의 긴 빛으로 도서관 안과 책장을 비추며 그 빛살에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은색으로 반짝거렸다. 그리고 곧 그 은색 빛의 파편들은 손을 이마에 대고 책 위에 엎드린 아미의 머리와 어깨에 눈처럼 소복이 내려앉았다.


아미는 꿈인 듯 현실인 듯한 졸음 속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첫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났다."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위버멘쉬는 극복자이다. 인간은 넘어서야 할 무엇이다.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 무엇이냐? 모든 존재는 지금까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창조해 왔다. 그리고 너희는 이 위대한 정오의 흐름에서 밀물인가 썰물인가?"

아미는 이것이 어쩌면 아프락사스로 가는 길? 아니면 위버멘쉬로 가는 길? 아미는 쏟아지는 졸음 속에서 평소에 늘 하는 대로 눈썹과 눈썹 사이가 근질거리는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그곳으로 가져가 긁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