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 1 (5회)

빛나는 책

by Eunyoung Kim


아미는 눈을 떴다. 눈썹 사이가 이상하게 간지러워서 눈을 떴다. 책장 사이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책장들이 나란히 서 있지 않고 미로처럼 여기저기 다른 방향으로 서 있었다. 어떤 것은 저 구석으로 밀려나 따로 떨어져 있고, 어떤 것들은 서로 조밀하게 모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듯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책장과 책장 사이의 바닥에는 책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일부 책장은 책 몇 권만 꽂혀 있는 채 텅 비어 있었다. 아미는 갑자기 달라진 도서관 모습에 어리둥절하여 책장 사이를 기웃거렸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누군가 있을까 하며 돌아보는데 저 멀리 책장 뒤에 빛 한 줄기가 보인다. 그 빛을 따라갔다. 빛은 저쪽 끝 혼자 뎅그러니 떨어진 책장 아래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쪽으로 다가가 보니 책장 아래 높이 쌓인 책 무더기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겉의 책들을 헤치자 제일 가운데 있는 책 한 권의 책갈피에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책을 꺼내 손에 들었다. 표지를 보니 '아미의 뇌정원'이라고 써 있었다. '아미의 뇌정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바짝 호기심이 나서 책의 첫 장을 조심스레 열었다. 겉장을 제치자 '서문'이라고 쓴 큰 글자가 보이는 듯하더니, 그 순간, 도서관 전체가 흔들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책장들이 비틀거리고 책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장의 일부가 벗겨지며 밖의 환한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에는 달과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공기가 축축하고 무거웠다. 마치 비 온 뒤의 숲처럼. 아미는 무서움에 숨을 죽이고 꼼짝도 못 한 채 서 있었다. 한참 후 흔들림이 잦아들자 참았던 숨을 후— 하고 내뱉었다. 그런데 향긋했다. 코끝에 스미는 냄새가 좋았다. 비 온 뒤의 숲에서 나는 흙냄새와 오래된 책들의 종이 냄새가 섞여서 기분이 좋아진다.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였지만 낯설지 않았다. 자연에서 느끼던 그 상쾌함을 불러오는 냄새였다. 속에 들어가면 편안해지고 기분 좋아지던 그 상쾌함을 불러오는 냄새였다. 그러고 보니 자연의 냄새와 오래된 책의 냄새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


도서관 천장의 거의 반쪽에는 깊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별들이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빛났다. 도서관 안은 그 하늘빛을 담은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아미는 비스듬히 선 책장 하나를 바로 세워보려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놀랐다. 손바닥의 감촉이 매끄러운 합판이 아니라 거친 나무 기둥처럼 느껴졌다. 손끝으로는 가녀린 떨림이 전달되고 손바닥에는 촉촉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 책장은 살아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모든 책장들이 살아있는 나무일까? 하고 다른 책장들을 살펴보는데 책장 사이에서 어떤 그림자가 움직였다. 긴 그림자를 뒤로하고 어떤 사람이 점점 다가왔다. 아미는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 누구예요?" 그 순간, 밤바람이 아미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려 시야를 가렸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걷어내자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미." 그가 그렇게 불렀다. 분명히 '아미'라고. 그의 목소리는 땅속에서 울리는 듯 낮고 단단했다. "저를 아세요? 어떻게 제 이름을…" 남자는 아미의 말을 막으려고 손을 들어 아미의 얼굴 앞에서 살짝 흔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흙냄새가 났고, 부서진 천장 사이로 내려온 별빛에 드러난 그의 손가락에는 검은 흙 알갱이들이 반짝거렸다. 그가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미는 끌리듯 그를 따라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낯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그는 좀 나이가 들어 보였고,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갔다. 아미는 무엇엔가 끌리듯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발밑은 온통 나무 뿌리들이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뿌리들이 부드럽게 풀리며 길을 터 주었다. 적막을 깨는 것 같아 조용히 가는데 무슨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듯하다. 작게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살아있는 나무 책장 속에 꽂혀 있는 책들이 속삭이는 소리였다. 아미가 조금 떨리는 듯한 책에 허리를 구부려 귀를 대 보았다. 아, 맞아. 이 책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책들이 자신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에 대해 다른 책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와, 재미있겠다! 고대의 수메르 사람과 니체가 서로 이야기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파인만과 이야기하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아니, 아니, 더 멀리 가서 석기시대 밤하늘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던 수렵채집인들과 오늘 인터넷과 인공지능과 우주 여행을 하고자 하는 우리 세대가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아, 그건 더 재미있겠는데!' 아미는 두려움을 잊고 그런 상상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이 비 온 뒤 숲의 축축한 흙냄새와 오래된 책의 냄새 조합이 아미의 영감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무 뿌리로 얽힌 계단을 올랐다. 숨이 조금 가빠졌다. 올라갈수록 바람이 세져서 아미의 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는 앞서 걸으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미는 딱 벌어진 어깨와 뒷모습만을 보며 따라가지만 어쩐지 안도감을 느꼈다. 계단의 중간에 그가 멈췄다. 그곳에는 작은 테라스 같은 것이 있었다. 그 테라스 안에 들어서서 아미를 돌아보며 손짓으로 불렀다. 아미도 그곳으로 들어갔다. 내려다보니 도서관 전체가 다 잘 보였다. 도서관의 반쪽은 원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반쪽은 밤하늘이 훤하게 트인 공간이었다. 별빛 아래 정원은 깊게 파여져 있다. 중학교 때 아빠 엄마와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본 부차트 가든의 선큰가든처럼 아래로 깊게 파인 정원이다.


그가 아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달과 별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주름 사이로 다정함이 서려있었다. 정갈하게 깎은 짧은 콧수염 위로 높은 코, 날카로운 턱선. 단정하고도 지혜로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특히 아미를 보는 그의 눈에는 지극한 신실함과 정다움이 고여 있었다. 그는 전부터 아미를 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서 기다린 사람처럼 아미를 바라보았다. "아미, 나는 위버멘쉬야." 아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랫동안 기다렸어. 네가 나를 불러주기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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