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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가 Dec 28. 2023

방송작가의 퇴사기, 두 번째

분노에서 슬픔으로

퇴사를 통보받은 다음 날, 그날도 다른 날과 똑같았다. 아침 일찍, 톡으로 앵커와 팀장이랑 아이템 회의를 했고 1등으로 출근해서 보고용을 쓰고 헤드라인과 인트로를 써서 단체방에 올렸다. 그리고 오늘도 내가 맡은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팀원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속은 화와 분노로 들끓었지만, 내색하기 싫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점심도 챙겨 먹으려 했지만, 도무지 밥을 넘길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틈틈이 친하게 지내는 이들에게 나의 상황을 톡으로 보냈다. 이런 억울한 상황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기 싫었다. 놀람과 위로가 뒤섞인 답들이 도착했지만, 내 마음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작가가 프로그램을 떠나는 경우는 개인 사정을  빼곤  프로그램이 폐지되거나, 좋지 않은 시청률 때문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그만둘 때다. 그런데 나는 정말 달랐다. 둘 다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사 안은 권고사직 전화를 받았느냐, 아니냐로 어수선했다. 그러나 내가 맡은 프로그램은 그런 바람 속에서도 안전지대였다. 시청률이 잘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회사는 나를 버렸다. 한 마디로 제작팀에서 오로지 나만 나가라고 한 것이다.  

권고사직 통보를 받은 작가는 나뿐 아니었다. 다른 프로그램 메인 동료 작가들도 나와 같은 처지였다. 결국 필요할 때만 ‘작가님’이고, 어려울 땐 ‘해고 1순위’였던 거다. 메인 작가를 해고한다고 하는데,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다. 10년 가까이 일한 작가도 결국 일개 프리랜서일 뿐이다.

오늘도 내 몫으로 주어진 원고를 쓰고, 후배 작가들 원고도 봐주고, 자막을 뽑고, 출연자들 챙기고 그리고 생방송을 지켜봤다. 팀장이 내게 슬쩍 말한다. 작가님, 일찍 퇴근하세요. 그의 배려가 마음에 닿지 않는다. 그냥 있을게요. 오늘 방송도 무사히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을 가득 찬 분노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대신  뭔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목이 턱 막히는 슬픔이었다. 결국 나는 울고 또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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