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따라 모든 것이 잘 풀렸다. 아침 일찍 맘에 담아두었던 작가의 그림을 사러 헤이리로 향했다. 나무들 위에 놓여있는 의자 하나가 내 마음에 쓱 들어왔기 때문였다. 갤러리 근처, 아빠를 모신 추모공원이 보였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아빠에게 들러야겠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랜만에 아빠 앞에 섰다. “아빠, 오랜만에 와서 죄송해요. 저희 모두 잘 지내요.” 갑자기 울컥했다.
아침부터 서두른 탓에 여유 있게 출근했다. 난 거의 매일 1등으로 출근했다. 텅 빈 사무실에 불을 켜고 적막이 가득 찬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하루 해야 할 일도 정리하고, 개인적인 업무도 처리하고, 방송에서 다룰 기사들도 읽어보고... 그날도 기분 좋게 하루가 시작됐다. 어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갑자기 방송 직전 앵커가 느닷없이 저녁 식사를 하잔다. 흔치 않은 일이다. 둘 중 하나다. 좋은 일이거나, 나쁜 일이거나. 저녁 식사는 맛있었고 대화도 즐거웠다. 식사가 거의 끝났을 무렵, 앵커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몹시 어려운 상황인 회사가 직원들을 상대로 강도 높은 권고사직을 받기로 했고 프리랜서인 각 팀 메인 작가들도 해고하기로 결정했다고. 앵커가 힘들게 말을 이어간다는 게 느껴졌다. 그의 말은 계속 됐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위에서 결정된 거라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번 달 말까지 정리해야 한다고. 뭔가를 따져 물어봐야 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알겠습니다.”
내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채워졌다. 개국 때부터 10년 넘게 일해 왔는데? 어려운 고비 속에서도 방송을 지켜왔는데? 시청률 순위 1,2등을 다투고 있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결국 노트북을 켰다.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지금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자부심, 회사의 통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프리랜서의 슬픔, 10년을 쌓아 올린 경력을 한숨에 날려버린 이들에 대한 분노.. 머리를 가득 채운 질문과 대답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의 방송 일기는 끝났지만, 퇴사 일기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