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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있다가도 밀물 밀려오듯 내게 모든 것이 스며들 때가 있다. 세상모든 것들이 나에게 들어옴과 동시에 나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은 나를 빠져나간다. 그러기를 수 없이 반복하다 보면 내가 나이지 않은 것 같아진다. 내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거대한 착각을 일으킨다. 착란일지도. 역시나 머리가 아파온다. 꼭 이럴 때 오른쪽 관자놀이 피부 깊숙한 곳이 묵직하고 지끈거리며 때론 심장이 관자놀이에 있는 것 마냥 쿵쿵 뛰는 느낌을 느끼곤 한다. 혼란스럽지 않은데 혼란스럽다. 외롭지 않은데 외롭고. 차갑지 않은데 차갑다. 파랑색의 감정들은 나를 몰아치고 다그치며 쥐어짜는데 붉은색 혹은 투명한 감정들은 나를 쉽게 빈 소라껍데기 버리듯 휙 나가버린다. 그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만의 세상에 갇힌다. 걸어 잠그고 또 걸어 잠근다. 더 이상 내 안에 있던 것들이 나에게서 제거되지 않도록 가두려 발버둥 친다. 그럴수록 오른쪽 관자놀이에 있는 심장은 요동친다. 더욱더 심하게 쿵쿵쿵. 마치 무엇에선가, 알 수 없는 ‘무엇’에서부터 달아나고 싶은 것처럼 문을 세차게 두드린다. 두렵다. 죽지 않겠지. 두렵다. 두렵고 고요하다. 고요하고 서늘하다.
시간 흘러, 관자놀이 감각, 무뎌진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난 감각은 몸에 남아있다. 관자놀이 고동도 잦아들었다. 모든 에너지가 소모된 느낌이다. 짙고 무거운 허기가 몰려온다. 분명 거대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 밖에서 보이던 해가 오른쪽 하늘에서 왼쪽 하늘로 이동했다. 창틀에 놓인 산세비에리아 그림자도 시간의 이동을 보여주었다. 산세비에리아의 그림자는 해와 반대로 왼쪽을 향하다 오른쪽으로 향해져 있다. 시간은 분명히 흘러갔다. 나만 지금의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존재하긴 하는 것이다. 죽지 않겠지 생각했지만 나름 공포감도 있었다. 혹시나 죽는 순간일까 하고. 두려웠나. 두려웠다. 지금은 죽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에게 사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쥐고 있어야만 하는 야심도 없다. 사실 죽어도 별 탈 없는 삶이니. 세상은 내가 등을 보이고 땅으로 눕는 대도 별 말없이 수용할 것이다. 흙으로. 제자리로.
차차 일어나 보고자 한다. 해가 뉘엿해진 만큼 몸의 에너지도 소모되었고 몸이 가지고 있는 당분도 소모된 만큼 이제는 슬슬 움직여야 한다. 방금 보았던 산세비에리아를 괜히 한 번쯤 들여다보았다. 그림자의 위치의 변화 말고는 잎의 모양과 잎의 숫자도 이상 없음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제야 나는 소파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몸이 꽤 무거웠지만 일어나겠다는 일념 하게 발을 소파 밑에 있는 페르시아 산 러그로 옮겼다. 페르시아 산이라지만 사실 알 수 없을 것이다. 강릉에 출장 차 방문했을 때 눈에 띄지 않으면서 눈에 띄던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소품가게에 들렀고 마침 또 붉은색 무늬가 자유자재로 활개 치던, 페르시아 ‘산’이라고 강조하던 붉은 니트를 입고 있는 남자직원에서 홀라당 넘어가 샀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페르시아‘산’이라고 믿으면 이 러그는 페르시아 출신이라고 믿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밟히는 러그 감촉은 매우 훌륭하다. 부드럽지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단단함도 지녔다. 러그주제에 기개가 훌륭하다. 발바닥 감각은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 매우 무디다고 생각하지만-가령 손과 비교하자면- 지면을 항상 밟고 나의 몸을 하루의 절반이상 가량 지탱해 주는 입장에선 서운할 수 도 있다. 그래서 나는 발바닥의 감각을 존중해 주는 편이다. 러그를 먼저 밟는 것도 발바닥이다. 일을 무사히 해내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발바닥이다. 지금 당장은 발바닥을 통해 나는 분명하게 살아있음을 그리고 생존에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존재다. 그렇게 무턱 산 러그도, 비교적 무감각한 발바닥도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페르시아‘산’ 러그를 몇 번이고 밟으며 감촉을 즐기곤 부엌으로 몸을 옮겼다. 뭐든 먹어야겠다 싶어 아일랜드 식탁아래 서랍장에서 햄과 김 한 봉을 꺼낸다. 딱히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라도 위장에 음식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밥을 꺼냈고 햄을 굽고 김을 싸고. 모든 일련의 과정엔 에너지가 들지 않았다. 소파에서 나와의 씨름을 한 것에 비하면 밥을 먹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비교하자면 바닷속의 고래와 땅 위의 콩벌레 같은 것 일 테다. 비교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굶주린 것은 아니었는데, 배고프지 않다고 생각도 했었는데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렸다. 적은 양이었지만 허겁지겁 먹고 나니 버리니 이러려고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각설하고 설거지를 하며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맥주 한 캔을 꺼내어 마셨다. 요리라고 할만한 시간은 흐르지 않았고 먹은 것도 양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맥주도 단순히 한 캔이었는데 그새 산세비에리아의 그림자는 모습을 감추었다. 찰나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잡을 수도 없게 사라져 버렸다. 시간의 흐름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은 것이다. 소파 위의 나와 나의 씨름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마지막으로 본 산세비에리아 그림자가 여름해가 지기 전 오후 일곱 시쯤 마지막 그늘이었을까. 다시 머리가 아파올 것만 같다. 대책 없이 또 소파 위로 올라간다. 다시 씨름이 시작되면 에너지를 한도 끝도 없이 소모해야 하니 그 이외의 낭비될 에너지를 모조리 응축하기 위함이다. 소파와 산세비에리아. 그리고 여름 해와 맥주. 잘 따지고 보면, 자세히 쳐다보면 그마저도 나쁘지 않은 하루였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두통이 사라졌다. 맥주를 마신 탓일까. 다시 찾아올 것만 같았던 두통도 없고. 배도 든든하고 나른한 알코올 감까지 나를 휘어 감싼다. 다행히도 현재로선 몸에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없다.
역시나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침대 위에서 철제 독서 등을 켜두고 읽던 책을 읽어보아도 책과 정신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듯했다. 거실로 나가 어두워진 창을 바라보며 생각을 잠재우려 해도 생각은 오히려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 다른 생각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글렀다. 오늘은 분명 자기엔 글렀다. 오후에 있던 일처럼 내 존재 구성을 모두 재탄생하게 만드는 경험을 하고 나면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여 손까지 덜덜 떨릴 만큼 그로기 상태이지만 잠은 꼭 오지 않는다. 초각성 상태. 아버지가 자주 했던 말이다. 초각성 상태. 종종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각성이 되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혹은 초각성 상태였다고 이야기했었다. 나도 그런 초월적인 무엇인가를 경험해서 초각성 상태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초각성상태이지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손이 덜덜 떨리는데 정신이 각성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경험을 통해 다른 차원의 개체와 연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영감이 폭발해 단테의 신곡과 같은 역작을 글로 써 내려가거나 드뷔시의 달빛 같은 곡도 악보로 만들어낼 수 없다고 느낀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그냥 힘이 없다고 느껴질 뿐. 내가 경험하고 있는 초각성 상태는 의미 없는 시간의 미로와도 같다. 빠져나가려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든 동서남북으로 위치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미로. 들어온 미로를 탈출해야만 한다. 들어온 이상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날 미로로 안내한 것이지만 나갈 수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나뿐이다. 그리고 타개할 수 있는 것도 나뿐이고. 세상에 나를 둘러싼 것이 나뿐이라고 생각이 단축됨과 동시에 나는 세상이 존재하는지도 모를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