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덧없음에 감탄을 하곤 한다. 나보다 어린 자의 죽음. 나와 비슷한 나이의 죽음. 일생을 선하게 살아온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어떤 존재도 죽음 앞에서는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이 없거니와 죽음의 문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이전의 가치와 실존은 누락되기 마련이다. 백만장자도. 노벨상을 탄 위인도. 세상의 변화를 이끈 리더들도. 나도. 나의 부모도. 나의 가족들도. 죽음은 모든 가치를 앗아간다. 앗아가다 못해 무無가 된다. 없다는 것을 살아있는 생명체는 상상할 수 없다. 탐구할 수도 없다. 추측만을 할 뿐. 상상만을 할 뿐.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형태 역시 위대한 글이지만 상상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없는 존재로 된다는 것은 다시 거슬러 있음의 존재로 되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또 역설적인 것은 죽음이라는 것의 숭고함이다. 죽음 역시 양면성을 띤다. 죽음은 분명 고고하고 숭고한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누군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 죽음으로서 누군가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생각. 혹은 죽음으로서 누군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생각. 죽음이 단순하게 지금 내가 가진 정신과 육체 그 모든 가치가 전자기기를 종료시키듯 꺼진다는 것 정도의 의미라면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고 싶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저마다 자신의 가치를 정신을 육체를 보존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쥐고 있는 것들이 있으니 쉽게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식에게 심장을 내어주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예술적 행위다. 교통사고로 뇌사자가 되어 누군가에게 장기를 내어줄 수 있는 서명을 한 자 역시 예술가이다. 자신의 모든 가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예술. 안중근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더라도 우리나라의 독립이 더 중요한 개념이었다. 예술. 그런 숭고함에 있어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on & off가 아닌 철학적인 고찰과 고뇌가 필요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정말 너무나도 덧없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덧없다. 덧없다고 느끼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단순해서일까. 아니면 무의 경지가 알 수 없기에 덧없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 내 존재에 대한 상실, 죽음은 실로 예측할 수 없게 다가온다. 비행기가 추락함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고 배가 좌초되어 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이끈 사고도 그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알 수 없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잡아 끌어당기고 그 힘은 거역할 수 없다. 생과 사. 그 경계는 너무나도 옅다. 항상 반갑게 인사하던 누군가가 죽음의 강한 중력에 끌어당겨져 다시는 안녕을 나눌 수 없을 수 있다. 생과 사. 너무나도 경계는 옅다. 나 역시 자칫하면 다른 경계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전혀 허무 맹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사람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고 싶다.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어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고 싶다.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서 내 생만큼은 덧없기 싫은 것일지도. 옳은 소리를 하고 싶어도 하지 않고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하고 싶다. 내가 아무리 옳아도 굳이 강조하고 싶지도 않고 필요한 말이라고 강력하게 느껴도 그 사람 그리고 내 하루를 내가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잠시라도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잠시라도 평안하고 안정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닌 나와 관계성이 있는 누군가가 말이다. 그래서 참된 악일지도 모르지만 이해하는 척을 한다. 사실은 난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음에도 이해한 척을 한다. 단 몇 시간 안에 이 사람을 내가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에겐 너무나도 짙다. 생과 사의 경계는 너무나도 옅기에. 그 옅음은 누구나에게 공평하기에.
몇백 번의 심폐소생술을 하며 가녀린 생의 불꽃이 꺼지는 순간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했다. 살릴 수 없음. 생은 사에게 먹힌다. 생의 힘보다 사의 힘이 몇백 배는 더 강하다. 태양의 중력과 지구의 중력이 다르듯 살아있음과 죽음의 중력엔 절대적 차이가 있다. 나와 동일한 나이의 인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 죽음을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 그런 죽음의 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인간의 완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슴을 압박하며 손에 느껴지는 뼈의 부서지는 감각은 처음에만 소스라치게 놀랐지 죽음의 힘을 경험하고는 그마저도 덧없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난 이해하는 척을 한다. 삶이 너무나도 덧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해하려고 발버둥 친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볼 때 그 등뒤에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관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 죽음 앞에선 어떤 가치도 부각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곤 그냥 웃기를 바란다. 멍청해도 상관없다. 바보 같아도 정말 상관없다. 내가 말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게 개소리로 치부되어 상관없다. 그냥 피식 웃기를 바라고 이해받았다고 느끼길 바라고 고민이 덜어지길 바라고 한숨을 내쉬어 조금이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이길 바라기도 한다. 나에게 힘을 부어주는 말. 그 말이 나를 위한 진실된 마음이 아닐지라도 상관없다. 그 말을 해준 것 자체의 존중이 담겨있을 테니까. 나의 안부를 물어보는 그 말. 그 말이 허울 같은 인사치레라도 상관없다. 잠시나마 그 관심의 비춰준 것이니까.
죽음 앞에서 나는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까. 죽기 전 내가 가진 거짓을 밝혀질 바엔 미리 솔직해지련다. 죽음 앞에서 나는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을까. 죽음이 나를 데려간다 해도 내가 너무 무거워서 놓기 무서울 바에는 가벼워지련다.
덧없기에 가벼워지는 선택 말고는 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