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미학

by 지우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책과 더불어 내가 가질 수 없는 시선. 내가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영화는 시각적으로 책은 상상의 고리를 만들어 나라는 개념의 확장을 해주곤 한다. 책은 직관적이고 가시적인 것보다는 내 머릿속에 누적된 무언가 들이 연결고리를 맺게 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굉장히 어렵고 느리고 지루할 수 있지만 연결고리들이 맺어질 땐 작은 희열을 느끼곤 한다. 능동적이고 정신적인 희열. 영화는 책과 다르게 굉장히 직관적이다. 은유가 포함되어 있고 생략되는 부분이 많다 한들 시각 수용체가 기둥인 문화적 활동이다. 그래서 바로바로 입력되는 정보에 뇌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슬픔엔 눈물. 행복엔 웃음. 여운엔 가슴아림과 먹먹함.


그중에서 영화를 가리는 편이기도 하다. 쉽게 산화되어 버리는 영화를 소비적으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영화에 대한 견식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의미 없는 슬픔을 느끼고 싶지 않고 허탈한 행복을 느끼고 싶지 않다. 불필요한 눈물을 흘리고 싶지도 않고 헛된 웃음을 품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영화를 고르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지부진하다 싶어 영화를 보지 못하고 티브이를 끄고 보고 싶은 것을 찾지 못했으니 오늘은 책이나 보자 할 때가 많다. 그만큼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스타일이 꽤나 까다로운 편이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소설도 영화도 허구를 다룬다. 아무리 실화를 다룬다고 해도 각색이 필요하다. 영화화된다는 것은 상업화된다는 의미고 상업화가 된다는 것은 현실을 아무래도 좀 뒤틀어서 허구적인 세계로 변모한다는 것과 같다. 혹은 반대일지도. 나는 그런 것을 가리지는 않는다. 너무 형식적이도 너무 허구뿐일지라도 상관없다. 그 대신 마음에 남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내 마음에 남는 것. 마음에 시퍼렇게 달궈진 인두로 낙인을 남기는 영화의 주제는 혹은 메시지는 사랑이었다. 내가 마음에 남는 사랑이라 함은 애절한 사랑이 아닌 어떤 무엇인가에 관한 사랑이다. 위플래쉬의 드럼. 라라랜드의 상상. 인터스텔라의 시간. 언포기버블의 모성. 행복을 찾아서의 부성. 이토록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랑의 형태는 정말 다양하다. 나는 그런 사랑의 유형을 말로 담기도 버겁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내가 수용할 때 느껴지는 저릿함은 분명 내게도 맑은 정신과 영혼이 존재함을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는 많은 사람들이 SF공상과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쿠퍼는 다 성장하지 않은 아들과 딸을 두고 범세계적인 미션을 가지고 우주로 나아간다. 그리곤 쿠퍼는 어느 행성에서 고작 몇 시간을 고생했지만 상대적 이론에 근거해 지구의 시간은 몇십 년이 흐르고 만다. 다시 본체 우주선으로 돌아온 쿠퍼는 지나간 아들의 영상메시지를 보는데 문제아였던 아들은 학교에서 어느새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좋은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쿠퍼의 마음을 영화에서 내비치지 않았지만 아들에 대한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리움만 남는다. 그 장면에서 쿠퍼는 오열한다.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의 간극에서 느껴지는 아쉬움. 그 근간은 사랑이었다.


다른 미스터리영화인 콰이어트플레이스는 소리에 민감한 괴물과 관련된 영화다. 소리를 내지 않음이 세상의 규칙이 되었다. 혼돈이 가득한 세상은 고요로 뒤덮였다. 그 안에서 겨우겨우 생존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 역시 미스테릭 하고 스릴 넘치는 킬링타임류의 영화 같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부모의 사랑은 또 나를 뒤흔들었다. 세상의 규칙이 바뀐 다음 아버지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매우 엄하고 규칙적인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위험에 처한 아들과 딸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자진해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그리고 아들과 딸에게 입 모양으로 사랑에 대한 말을 전달하는 모습에서 사랑은 어느 곳에서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느낀다.


수많은 문화적 메시지는 사랑이 중심이다. 사랑이 주제인 소재는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시대와 세대를 가지리 않고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사랑의 미학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치를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면 점점 어두워져만 가고 있는 점점 희미해져 보이는 세상의 길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유독 사랑과 관련된 주제에선 마음이 아리곤 한다.


사랑의 미학. 미학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을 쫓는 학문이다. 나는 영화와 책을 보며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곤 한다. 나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사랑의 아름다움을 쫓는가. 내가 경험해 보아서? 아니면 내가 그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모르겠다. 무언가를 이해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의 나는 나의 부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을 부정함에 가깝다. 그런데 어제 영화를 보며 문득 부모의 사랑에 관한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지금 나는 부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엇나간 사랑이라고 기억하기도 한다. 나의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땐 내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얼어버린 그들을 향한 내 마음이 녹기나 할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유독 문학이나 영화에서 그런 가족적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어서인지. 조금이라도 마음이 녹을까 싶어서일지. 그리고 결국 사랑받았다고 믿고 싶어서 이해하고 싶어서 어떻게든 그 끈을 잡고 마음속으로 꾸역꾸역 넣는 것일지도.

혹은 어쩌면 아름답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사랑의 아름다움을 안 이상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어떤 것이 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미학. 사랑의 아름다움을 내가 세상을 등지는 날이 온다 한들 다 알 수 있을까. 모른다. 나는 콜미바이유어네임에 나온 그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오펜하이머와 진 태트록의 사랑에 대한 지점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의 어떤 지점에 대해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사랑엔 분명히 분명하게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비록 내가 영화와 책을 통한 그리고 나만의 경험을 통한 사랑을 배웠을지라도 말이다.


결국 알고 싶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내가 알고 이해하고 싶어서, 나는 사랑의 미학을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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