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지우

누군가의 민낯을 본 적이 있는가. 나를 대하는 입장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를 대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에서 그 가벼운 민낯을 본 적이 있는가. 약자를 대하는 악한 모습. 거대한 힘에 죽은 듯이 지내는 누군가. 어떤 것에 매우 소심해지고 강건하지 못하며 나약해지는 모습. 이득을 취하려 다른 사람의 피해를 보지 못하는 누군가의 모습. 누군가를 타인인 것처럼 표현했지만 내 자신 역시 그 누군가가 될 수 있음은 다 알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가 되고 누군가는 내가 된다. 나 혹은 누군가는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에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매우 본능적이고 매우 개인적으로 변하는 순간. 그 순간이 민낯이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된 적이 있는가. 이끌림에 매혹되어. 분노의 대상이 되어. 생각나고 곱씹고 되돌아보고 다시 또 생각나는 그런 존재. 참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다.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그런 것. 쉽게 얻을 수 없는 그런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그런 참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얻고 경험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설령 인간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설령 어긋난 것일지라도 그것이 설령 문제가 되는 것일지라도 당사자에겐 참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음에도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거역할 수 없는 존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니까.


체코출신 작가인 밀란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참기 어려운 존재 즉, 매혹됐고 거스를 수 없는 장력을 가진 어떠한 것에 상대적인 가벼움을 이야기한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제목자체가 이해가지 않았다. 아마 그 시기의 나에겐 책의 제목자체도 무거움을 선사했던 것 같다. 책의 묵직한 페이지 수며 책 안에서 풀어가며 들려주는 이야기 하며 모든 것이 어려웠다. 소설 속에 주된 인물은 대략 네 명 정도 되는데 그 이상의 인물의 풀이며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도 애매하고 갑자기 밀란 쿤데라가 소설 속에 진입하며 설명하는 듯한 말도 굉장히 많다. 그래서 나는 처음 구매했던 책을 팔아버렸다. 어떤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고 이해도 불가능하고 가지고 있다한들 다시 보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것이 몇 년 전의 이야기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물리적 성장을 했고 정신적 성숙이 과거의 나와 상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만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제목마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 참을 수 없음이 이제는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내게 그런 존재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존재의 가벼움 역시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속성을 낱낱이 알 수는 없겠지만 그 존재가 가진 가벼움은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것. 내가 가진 욕망과 내게 매혹적인 것들이 강한 장력을 가지고 있다한들 그것이 중요함을 뜻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가볍다. 그렇다면 욕망과 매혹적인 어떤 것은 가볍다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내게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은 분명 그런 가벼움을 지녔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들은 분명하게 무거운 속성을 지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욕망. 욕망은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나 자신의 내면일 수 있고 내가 아닌 누군가 또는 어떤 것에 해당하는 욕구일 수 있다. 욕구는 나름 건강한 것이다. 욕구를 잘 이해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존재다. 입구가 있다면 출구가 있어야 하는 것. 입구만 존재하게 되면 욕심으로 이해되며 출구만 존재하면 건강할 수 없다. 욕망. 어떤 것에 대한 강력한 끌림을 말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대게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합리적이라면 욕망을 품기 어렵고 이성적이라면 욕망을 다스를 수 있다. 그러기에 아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아이들은 욕망을 다스리기 어렵다. 눈앞에 보이는 젤리를 욕망하며 잠을 자야 함에도 눈앞에 보이는 장난감에 쉽사리 부모의 의도대로 따라줄 수 없다.


욕망. 실제로는 아이들 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성숙을 이루었다는 어른들의 행태를 보아도 사실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오히려 성인이 된 사람은 자신을 뜻대로 행해도 된다는 것을 알기게 욕망으로부터 파생되는 위험과 그릇됨이 미화되기도 하며 눈을 가리기도 한다. 종종 비윤리적인 영역을 넘나드는 욕망. 그러나 그 실체를 직시할 수 있다면 그 존재의 가벼움을 알게 된다. 가벼움을 알게 되면 욕망의 크기는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 싱겁게 끝나기도 한다. 욕망은 허상적 존재다. 허상. 빌 허虛 그리고 모양 상像. 비어있는 모양. 내용물은 가볍기 그지없다. 공갈이며 쭉정이다. 욕망을 제대로 둘러보고 두드려보고 만져본다면 대게 많은 이들이 깨달을 수 있다. 실제론 비어있는 형태라는 것을.


그런데 그것을 앎에도 우리는 욕망을 참기엔 너무나도 나약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 즉, 욕망의 존재가 가벼움을 알고 있음에도 참을 수 없기에 언제나 우리는 죄를 짓는다.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즈음 성경구절이 나온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욕망에 가려진 우리는 스스로 눈을 가리기도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눈이 가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욕망에 젖어드는 순간 우린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정녕 알 수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 죽은 육신의 상태를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안다지만 자신을 모른다. 그것이 이 소설의 근간이라 느낀다. 그래서 욕망의 가벼움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욕망을 자꾸 확인해보아야 한다. 내게도 누구에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는 있기 마련이고 사실 그것이 가볍고 공허한 존재임을 안다면 조금은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소설과 문학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나는 공상적인 것일 뿐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비어있는 생각의 비어있는 사념의 결집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허구인 것을 알아서 그랬을까. 그런데 소설을 허구로만 바라보는 것은 그 실제적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소설은 결국 삶과 자전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소설은 오래전부터 철학과 함께 사람을 탐구했다. 철학은 대게 반박의 학문이다. B는 A를 반박하며 보충하고 C는 B를 반박하며 보충한다. 그렇게 사람의 모든 것을 그리고 그 근원지를 탐색한다. 그러나 소설은 철학과는 다르게 사람이 비치는 모습을 조명할 뿐이다. 영화를 찍는 다면 카메라가 있고 조명판이 있는 것처럼 특정상황에 입각하며 조명판을 들이대고 카메라로 찍어 송출. 나는 철학도 소설도 좋아하지만 소설에 마음이 더 이끌리는 것은 단순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사람을 송출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도 그렇다. 고됬던 인생도 있고 이렇게 윤택하고 즐거운 삶을 사는 이도 있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도 있고 마음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도 있다. 그 틈 사이사이 가벼움이 존재한다. 우리에겐 모두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소설은 담담하게 조명판과 카메라로 송출.


그런 이야기안에서 나는 나를 또 이해한다. 소설의 참기능. 그런 이야기 안에서 내가 이끌리는 어떤 것의 가벼움을 인지한다. 소설의 참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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