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와 우. 변화와 고수. 진보와 보수. 나아감과 유지. 사람은 언제나 선택의 삶, 선택의 기로, 선택이라는 기나긴 길 위에서 살아간다. 인생은 선택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다.
인생은 B brith와 D death사이에 있는 C choice이다.
많이 들어보았다. 친구들과 장난처럼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 이야기.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선택이다. 선택. 나는 팔을 두 개 가지고 있다. 왼팔과 오른팔. 내가 길을 걸어가도 길을 선택해야 한다. 오른쪽 왼쪽. 운전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좌회전과 우회전을 반복한다. 오늘 내가 무엇을 먹을지 간식을 먹을지 말지 커피를 먹을지 말지 계속되는 선택. 나의 인생의 길 위엔 숫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개수의 영원적인 선택이 놓여있다.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도 선택한 것이고 나의 왼손 근처에 있는 아이스커피 역시 먹고자 한 선택을 한 것이다. 글의 주제를 고른 것도 수많은 영감 중에 하나를 선택한 것이고 지금 내가 무엇을 표정을 지을지도 계속해서 선택해 나아간다.
안타깝게도 선택의 양 극단은 서로를 볼 때 매서운 눈으로 보기 마련이다. 자신이 내린 선택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정말 옳기에 반대편에 서있는 극단의 다른 선택을 한 누군가를 어떤 단체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위에서 말했듯 좌회전 와 우회전일 뿐이다. 가야 하는 목적지가 사람마다 다르기에 1차선에 정차해 좌회전을 하기도 하고 3차선으로 주행하다 막힘없이 우회전을 할 뿐이다. 어느 순간 두 차는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의 연속일 뿐. 선택의 지점에선 각자가 옳은 것이고 서로가 틀림은 아니다.
그럼에도 선택과 동시에 미움이라는 것 역시 공동으로 존재한다. 자신의 선택에 합당한 이유를 지녔음을 알기에 더욱 강한 믿음으로 나아간다. 그게 어떻게 보면 건강하다. 자신의 선택을 믿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하지 못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생기는 문제는 자신의 강한 자아다. 자아는 많은 것을 수반한다. 그리고 유독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자아는 매우 개인적이며 매우 자존적으로 작용한다. 건강한 자아라면 진정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자아가 아닌 자신 자체에 자존이 건강하다면 선택에 대해서 자신의 선택 이외에 모든 선택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선택과 동일한 것이 옳은 것이 아닌 내 선택은 내게 합당했다 랄까. 그렇게 되면 누군가의 선택 역시, 나와는 다른 선택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지 비난하게 만드는 활을 쥐어주는 것이 건강한 자아로 보이지 않는다.
건강한 자아는 때론 변화를 하고 때론 유지를 한다. 매번 변화를 하는 것이 건강한 것일까. 매번 유지를 하는 것이 건강한 것일까. 아니다. 선택을 하는 것이다. 선택을 하고 결정이 내려진다. 선택과 결정은 다르다. 선택은 단순한 과정이다. A와 B와 C를 손을 짚는 단순한 과정. 그러나 결정은 마음의 행태를 말한다. 결정을 내린 순간부터는 마음에 장대 같은 곧은 심지와 바위처럼 단단한 굳음이 필요하다. 선택과 결정을 분리해야 한다. 선택은 가벼운 것이지만 무겁게 다루어야 하고 결정은 무겁게 굴어야 하지만 누군가에겐 가벼워 보여도 된다. 멍청해 보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가치관의 충돌은 정말 많은 것을 발생시킨다. 누군가를 심하게 해치기도 한다. 시끄럽다고 누군가에게 칼을 휘두른다. 자신의 가치가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그것이 악인이 선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심히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는 자신의 가치가 너무나도 높게 평가된다. 실제는 그렇든 아니든 상관없다. 혼란스럽기에. 그러나 혼란스러움이 잦아들고 나면 극심한 수치심과 극심한 죄책감이 몰려온다. 정상적인 경우에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해친 누군가는 정상적인 경우에 심신 미약을 주장한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지만 자신의 가치관을 누락시킨다. 국가 간의 가치관 충돌 역시 존재한다. 국가라는 공동체는 그 나라에만 해당하는 민족성 자치성 자주성 국가개인적인 집단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치관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그러나 국경이 맞닿아져 있는 국가들 간엔 그런 분쟁이 너무나도 자주 일어난다. 이스라엘과 파키스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남한과 북한. 중국과 중국에 속한 여러 민족들.
선택은 선택이고 결정은 결정이다. 선택도 개인적인 것이고 결정은 더 개인적인 것이다. 어느 곳에 그대로 잣대를 들이대 비난하고 헐뜯고 해치고 파괴하는 것은 비문명적이고 비인간적이다. 변화는 유지를, 유지는 변화를 존중하는 자세가 너무나도 중요해지는 시기로 보인다. 사람은 좌파이며 우파다. 사람은 변화하기도 하고 유지하기도 한다. 사람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지만 때로는 우거진 나무 밑에 멈춰서 그늘 안에서 평안히 쉬어가기도 한다. 사람은 언제나 선택하고 결정하고 나아가고 멈춰 서고 좌회전을 하고 우회전을 한다.
존중. 존중이 최선이다. 존중만이 내가 나아지고 내 주변이 나아지고 내 사회가 나아지고 내 삶이 나아진다. 국가가 나아지고 세계가 평화롭기를 바란다. 존중이라는 것은 쉽게 뱉을 수 있지만 쉬운 것은 아니다. 꽤나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존중은 연습이고 존중은 훈련이다. 나 자신을 존중해야 누군가를 존중해 줄 수 있고 때론 누군가를 존중함으로써 자신을 다시 존중할 수도 있다. 나는 변화 앞에서, 나는 유지 앞에서 누군가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필수적이고 불가결하다. 이해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존중합니다가 낫다. 이해하고 싶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태도가 낫다.
존중은 다시 내가 항상 말하고 싶은 이해의 영역으로 되돌아간다. 이해할 수 없다면 존중하는 것. 이해하기 싫다면 존중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본이다. 최선의 기본은 그것으로부터 시작함을 의미한다. 존중은 끝이 아니다. 진정한 시작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존중을 함으로써 그 관계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어 존중한다면 불만은 사라진다. 이해하기 싫지만 존중한다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존중받는다. 나는 누군가의 거울이고 누군가는 나의 거울이다. 존중함으로써 나는 이해를 받고 존중함으로써 나는 타인을 이해한다.
변화와 고수. 변화는 고수를 존중하고 고수는 변화를 존중한다. 좌회전이고 우회전이다. 우회전 역시 좌회전해야 할 때가 오고 좌회전 역시 우회전을 해야 한다. 운전이란 선택의 연속이다.